공무원의 첫 기억은 동네의 면서기
업무 기록하던 그의 ‘검은수첩’ 동경
공무원의 첫 기억은 동네의 면서기
업무 기록하던 그의 ‘검은수첩’ 동경
선택약정·전자서명법·보편요금제…
생활 밀착형 정책 그의 손에서 탄생
온·오프 경계 뚜렷한 생활규칙 실천
공직 인생 2막의 목표는 ‘행복 ON’
영화 ‘다이하드’ 속 존 맥클레인 형사(브루스 윌리스)의 미션은 늘 위태롭다. 보는 관객마저 진을 빼게 만드는 극한의 액션과 숱한 위기를 넘어 생존하는 과정은 영화의 백미다. 맨 몸으로 고군분투하며 ‘깔딱고개’의 순간을 넘어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같은 근성이 주인공의 매력이자 30년 넘게 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비결이다.
전성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은 지난 30여 년의 공직 생활을 한 마디로 “영화 다이하드 같았다”고 요약했다. 밖에서는 ‘철밥통’으로 불리지만, 속살을 들춰보니 평생 공무원 길을 걸어온 전 원장의 인생사는 맥클레인 형사와 쏙 빼닮았다.
1990년 제34회 행정고시를 합격하며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산 증인’이다.
국내 ICT의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전 미래창조과학부)에서도 ‘꽃’으로 불리는 전파정책국장, 통신정책국장, 대변인, 기획조정실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이른바 ‘엘리트 코스’만 밟았다.
말 그대로 공직 생활의 ‘꽃 길’을 착착 이어 왔지만, 그 과정은 오히려 온실 속 화초가 아닌 악착스러운 잡초에 가깝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봅니다”고 말하는 그의 ‘악바리’ 끈기는, 영화 ‘다이하드’를 관통하는 ‘끈질김’과 닮아있다.
올 1월 IITP 원장으로 취임하며 본격 공직 생활 2막을 시작한 그를 만났다.
‘이장’ 아버지와 시골 면서기의 ‘검은 수첩’
30년 공직 생활을 한 그에게 ‘공무원’의 첫 기억은 남다르다.
어린시절 전 원장에게 공무원의 ‘표상’은 다름 아닌 시골 동네 면사무소의 면서기였다. 마을 이장이었던 아버지 덕에 면서기가 집에 종종 찾아오곤 했는데, 당시 봤던 면서기의 ‘검은 수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전 원장은 “시골에서 비료를 나눠주고 주민들이 퇴비를 잘 쌓았는지, 추수를 잘했는지 점검하는 면서기가 내가 본 첫 공무원이었다”며 “자전거를 타고 검은 수첩을 들고 기록하는 풍경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어린 마음에 그 검은 수첩이 공무원의 상징처럼 느껴졌었다”고 말했다.
면서기의 검은 수첩을 동경했던 어린 아이가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시골 이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는 “아버님이 상당한 명필이시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크셨다”며 “당시만해도 시골에서 여자가 대학교 4년제를 간 사례가 없었는데 누님이 처음으로 갔다. 그 정도로 교육열이 남 다르셨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기대대로 행정고시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하셨던 사람도 아버지다. 전 원장은 “행시 1차에 붙었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혹시라도 2차에서 떨어질까봐 참았다고 하시더라”며 “시골 이장이셨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던 어린시절이 지금의 공직생활의 첫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평균 3년 이상이 걸린다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전 원장은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하루에 계획한 목표치를 반드시 공부하면서 시험을 준비했던 것 같다”며 “어머니가 굉장히 끈기가 있으신데, 행시 준비할 때 이 부분을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제비뽑기’로 시작된 ICT의 인연…‘빨간펜·검은펜’을 섭렵
그가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곳은 체신부다. 우편이 정보통신의 개념으로 막 바뀌기 시작하던 시절이다. ICT 분야와의 첫 인연은 ‘제비뽑기’로 시작됐다.
전 원장은 “수습 때 제비뽑기를 해서 실국을 배치받았다. 공무원을 준비할 때부터 정보통신 업무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정보통신국을 뽑게 됐다”며 “나중에 다 우정분야 근무로 내려보내서 섭섭한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당시 제비뽑기가 정보통신 분야와의 첫 인연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전 원장은 공직 생활 동안 정보통신과 방송 분야를 ‘도장 깨기’ 하듯 두루 거쳤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정보보호과, 통신이용제도과, 국제협력관 등을 거쳤고. 미래창조과학부 전파국장과 대변인, 과기정통부에서 통신정책국장, 기획조정실장을 거쳤다. 요직을 섭렵한 보기 드문 이력이다. ICT의 손꼽히는 ‘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이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전 원장은 “공무원들의 업무는 흔히 빨간펜 업무와 검은펜 업무라고 부른다”며 “검은펜은 정책 등을 기획하고 만드는 업무라면 빨간펜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국회, 청와대에 보고하는 관리적인 업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협력관, 대변인이 빨간펜 업무라면 전파국장, 통신정책국장은 전형적인 검은펜 업무”라며 “공직생활 동안 이 둘을 반반씩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억’…선택약정, 전자서명법 그의 손에서
방송, 통신 분야의 산 증인인 만큼 현재 국민 생활에 밀접한 방송, 통신 정책 중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한 것이 적지 않다.
통신분야에선, 공시지원금보다 할인혜택을 강화한 ‘선택약정 25% 요금할인’이 대표적이다. 장년층, 소외계층 등의 보편요금제 등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다양한 정책 중에서도 전 원장은 특히 ‘전자서명법’의 제정 과정을 공직생활의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꼽았다. 전 원장이 초임 사무관 때 맡았던 업무다.
전자서명법은 전자 상거래에 필요한 전자서명이 인감 등과 동일한 효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지금은 일상이 된 온라인·모바일 결제, 인터넷 뱅킹 등의 기반이 된 법이다.
그는 “1995년 인터넷이 생기고 온라인 상의 정보통신 기틀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온라인으로 바뀌는 환경에서 전자서명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려 다녔다”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 통증이 심하더라. 생각해보니 이걸 설명하러 다니느라 한 두 달 간 말을 너무 많이 했던 탓”이라고 전했다.
전 원장은 해당 법이 통과됐던 날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법이 통과돼 지금까지 잊혀지지도 않는다” 며 “법을 만들고, 제도화하고 실제로 실행하고, 관리할 기관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않았던 이 과정을 경험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이하드’의 치열함, 30년 공직생활 원동력…‘행복’ 해피엔딩을 꿈꾸다
치열했던 그의 30년 공직 생활 동안 그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던 것은 ‘끈기’와 ‘집념’이었다고 전 원장은 말했다.
전 원장은 “다가 오는 일을 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며 “다이하드 주인공이 죽을 듯 힘들어하면서도 결국엔 일을 끝내 듯 한 번 물면 끈질기게 가져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힘든 일이 “일이 없는 일”이었을 정도로 쉼 없이 달려온 전 원장은 이제 온·오프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하는 생활 규칙을 지키는 데 힘을 싣고 있다.
전 원장은 “개인시간과 근무시간을 명확하게 나누고 쉴 때는 스마트폰처럼 내 자신을 충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며 “스마트폰을 껐다가 켰을 때 메시지가 우수수 오는 것처럼 퇴근 이후에는 생각을 끄고 출근하면 다시 ‘온’ 모드로 옮기는 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IITP 원장으로서 제 2의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의 최종 목표를 물었다. 탄탄한 이력을 쌓아온 그에게 또 하나의 ‘굵직한’ 목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답은 의외로 짧고 명료하다. 바로 ‘행복’이다.
전 원장은 “아내와 1년에 70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데 그 순간이 행복하다”며 “가족들, 내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게 최종 목표”라고 웃으며 말했다.
끈기와 집념으로 30년 공직 생활의 ‘신화’로도 불리는 그의 다음 행보는 ‘행복’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다이하드 시리즈의 결론도 늘 ‘해피엔딩’이었다. 박세정·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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