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시간 주어져도 늘 공허한 존재 ‘지루함’은 인류의 정착생활에 기인한 것 여가마저 지배하는 소비사회가 더 부추겨 한가함·지루함의 경계에 대한 자각서 출발 전쟁·빈곤·노동에 빼앗긴 안식 되찾아야

“뭐 좀 재미있는 일 없어?” 한가할 틈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 질문은 불필요해보이지만 참 많다. “쉬고 싶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시간만 비면 채우지 못해 안달이다. 그렇게 시간표를 메우며 살아도 인생은 늘 심심하고 재미없고 공허하다. 시국을 한탄하고 재해를 걱정하며 불의의 희생자들을 안타까와 하고 흉악사건을 끔찍해하지만 오늘도 “화끈한 소식”을 찾아 인터넷을 서핑한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다카사키경제대 준교수)라면 아마도 “나는 지루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저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최재혁 옮김/한권의 책)는 ‘지루함’을 현대인들의 존재 조건이자, 철학의 근본 물음으로 삼고 이를 성찰한 책이다.

저자는 “‘음식과 집을 얻을 수 있는 수입’과 ‘일상의 신체활동이 가능할 만큼의 건강’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엄습하는 일상적 불행”이라고 버트런드 러셀이 지적한 현대인의 역설로부터 출발한다. 즉 “인류가 지향한 풍요로움이 달성되면 인간은 거꾸로 불행해진다는 것”이 현대인이 당면한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파스칼도 “인간의 불행은 누구라도 방에 꼼짝 않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했을 정도로 지루함은 꽤 오랜 현안이었다.

몰두하고 열중할 것이 과연 ‘욕망의 대상’이고 ‘욕망의 원인’일까.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토끼 사냥에 나서는 사람에게 토끼를 가져다주면 기꺼이 사냥을 포기할까? 도박하는 이에게 도박으로 딸만한 돈을 미리 주면 그는 도박을 멈출까? 아니다. ‘욕망의 대상’(토끼, 돈)이 ‘욕망의 원인’(사냥, 도박, 즉 기분전환)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원래부터 지루함을 안고 사는 존재였을까? 저자는 ‘지루함’은 수백만년에 걸친 인류사에서 비교적 최근인 1만년전에야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이리 저리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던 인류는 지루할 틈이 없었지만 정착생활을 하면서 청소와 쓰레기ㆍ배설물처리 등의 반복 생활을 익혀야 했고, 유목생활에서는 필요없었을 금기와 규율을 생성ㆍ수용해야 했으며, 물품의 저장과 교환으로 인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지루함을 피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정착혁명’에 이어 ‘지루함’의 또다른 계기는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근대화 이후의 노동 형태와 근로자의 여가까지 지배하고 상품화하는 소비사회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저자가 이르는 결론은 “지루함과 공존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첫째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반성적 사유, 즉 한가함과 지루함에 대한 자각이다. 두번째는 사치스러움의 회복이다. 세번째는 즐기는 것의 훈련이다. 한마디로 다시 말해 “즐기는 것을 알고, 사고하게 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기호나 브랜드가 아닌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문화와 오락 예술을 누리면서 훈련과 사유를 거듭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 게으르게 웃고 먹고 마시고 즐길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하라는 것이다. 신이 허락한 제 7일째의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돌려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쿠분 고이치로 교수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한가해질 것인가? 모두에게 한가로움을 허락하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는 질문을 던진다. 전쟁, 기아, 빈곤, 불평등, 자연재해, 노동착취로 인해 ‘한가함’이 허락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한가함과 지루함에 관한 최후의 ‘윤리학’인 셈이다.

이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