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디를 가도, 사인해 달라며 장도리 내미는 사람이 꼭 있어요. 얼마전 브라질 상파울루 영화제를 방문했을 때는 한 아가씨가 손을 내밀며 부탁하더군요. 손등에 사인받고 문신을 하겠다고. 극중에 오대수(최민식 분)가 15년간 갇혀 살면서 해가 바뀔 때마다 몸에 새기잖아요. 사인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 난감하더군요. 최대한 작은 글씨로 써 줬죠. ”
지난 2003년 11월 21일 ‘올드보이’가 국내에서 개봉한 지 꼭 10년이 됐고, 당시 마흔 살의 젊은 감독이었던 박찬욱은 이제 오십 고개를 넘었다. 10년간 ‘올드보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스타일과 소재, 드라마의 ‘괴작’이자 ‘걸작’으로 유명세를 떨쳤고,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마니아와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이 작품으로 2004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이름이 됐다. ‘올드보이’의 10주년 기념 재개봉(21일)을 앞두고 최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박 감독을 만났다.
“지난 10년 사이에 저에게도 많은 일이 일어났죠. 돌이켜보면 ‘올드보이’ 이전에 장편 4편(‘달은 해가 꾸는 꿈’ ‘3인조’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을 찍고, 이후에 또 4편(‘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스토커’)을 만들었습니다. ‘올드보이’가 제 경력의 한 복판이었던 것이죠. 그 동안 단편(‘쓰리, 몬스터’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청출어람’)도 찍고, 동생과 함께 작업(‘파란만장’)도 했으며, 담배도 끊었어요. 여러모로 기억할만한 10년이긴 합니다.”
10년전 초등학생이었던 딸은 어느새 대학생이 됐다. 딸은 대학 입시를 마친 지난해에야 아빠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봤다. 박 감독은 “다른 제 작품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어도 어릴 때 보여줬는데, 이 작품만은 제 자신도 조금 꺼려졌던지 늦게 보여주게 됐죠. 아들이면 더 일찍 보여줬을까요?”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사회적 금기가 ‘복수극’의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해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박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작품을 기획하면서 논란이 될 것은 예상했죠. 도덕성 논란을 어떻게 감수해야 할지 겁도 많이 냈어요. 제작자는 등급외 판정이 나올까봐 걱정도 많이 했죠. 하지만 수정 요구도 없이 심의를 통과했고, 다행히 논란도 심하게 벌어지지 않았어요. 근친상간이 다뤄지긴 하지만 인물 상호간에 전혀 모르는 채로 진행되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감독으로서 저는 (비윤리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봐도 걱정이었지만, 논란으로 인해 극중 반전이 알려질 스포일러도 우려스러웠죠. 하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조용했고, 우리 나라도 이런 문제 받아들이는데 성숙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올드보이’는 지난 10년간 세계의 각종 단체나 매체에서 뽑는 영화사상 걸작 목록에 빠짐없이 꼽히기도 했지만,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2007년)의 범인에게 영향을 준 영화로 지목되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 이전엔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같은 경우도 있었죠.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범인이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영화 모방범죄’의 예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이 한 사람의 영혼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의 범인은 셰익스피어 문학강좌도 열심히 들었다고 하는데, 맥베스의 살인 장면이 영향을 줬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을 다루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영화적인 기교와 과잉된 스타일을 많이 사용했고,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냈습니다. ‘이 세계는 악몽같은 허구의 세계’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죠. 말하자면 롤러코스터도 돌아가고, ‘유령의 집’에선 사람의 목도 떨어져나가는 테마파크같은 세계로 묘사한 거죠. ”
이번 재개봉은 필름으로 촬영했던 작품을 온전히 디지털로 변환해 이루어진다. 필름의 거친 질감이 살아있지만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세련된 화질로 ‘업그레이드’됐다. 개봉 버전과 내용이나 장면이 바뀌는 것은 없지만, 이제까지 거의 알아본 관객이 없는 ‘옥의 티’ 하나는 수정했다. 장면 한 구석에 보일듯 말듯 영화 촬영 스탭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워냈다.
“돌이켜보면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등이 나온 2003년엔 한국영화계에 에너지가 넘쳐 있었을 때입니다. 뭐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다들 용기가 있었고, 뭔가 예술적인 실험이나 과감한 주제 선택이 영화의 흥행 및 상업성과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담한 작품일수록 더 흥행이 잘 될 수 있다고 여겼죠. 지금은 투자배급사의 힘이 강해졌고, (기획이) 좀 더 공식화되고 매뉴얼화됐죠. 통계와 설문조사 같은 기법이 강화됐구요. 시대에 따른 조정과 변화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능력이나 성향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흐름에서 봐야죠. 이제 봉준호를 숭배하는 후배들도 있고, 나홍진이나 강형철, 조성희같은 감독을 좋아하는 팬도 많지 않습니까. 저도 다 유행으로 지나가는 거죠. ‘잉투기’같이 요새도 여전히 놀라운 에너지와 창의력을 가진 영화가 나오고 있어요.”
박찬욱 감독은 동생인 박찬경 감독과 함께 시민과 함께 하는 서울시의 영상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차기작은 ‘스토커’에 이어 미국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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