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박영서 특파원]개봉 첫날 관객이 한 명도 없는 영화도 있다. 더구나 14억 인구 대국인 중국에서. 바로 ‘인민영웅’ 레이펑(雷鋒)을 소재로 한 영화다.

레이펑의 정신을 기리는 ‘레이펑의 날’인 지난 5일, 중국 전역에서 레이펑을 다룬 3편의 영화가 개봉됐다. ‘청춘 레이펑’ ‘1959년 레이펑’, ‘레이펑의 미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흥행성적이 참담하다. 난팡두스바오(南方都市報)는 ‘청춘 레이펑’이 난징(南京)에서 개봉 첫날 4차례 상영됐으나 ‘단 한명’의 관객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제작사측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90명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해명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0명’이나 ‘90명’이나 ‘오십보 백보’다. 관객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레이펑의 굴욕’이다.

영화 상영 전에 중국의 방송·영상물 감독기관인 광전총국(廣電總局)은 전국의 상영관들에게 이들 영화의 상영회수를 보증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 극장들은 하루 4회 상영 후 슬그머니 영화를 내려버렸다.

상부기관의 지시가 무섭긴 하지만 관객이 거의 없는 상황을 시장경제원리 상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이다.

중국인들의 기억에선 자기 돈을 내고 레이펑 영화를 본 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학교, 기관, 기업의 단체관람이기 때문이다. 결제는 국유기업이나 기관들 몫이다.

노년의 한 중국인 교수는 “50년 전 레이펑 영화나 지금의 레이펑 영화나 별 차이가 없다”면서 “참신성이 떨어지니 재미가 없고 그러니 요즘 누가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영화를 보겠냐”고 반문한다.

레이펑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범병사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7살때 고아가 된 그는 신중국이 건설되자 처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아동단, 소년선봉대, 공산주의청년단을 거쳐 1960년 군에 입대한 그는 1962년 8월 교통사고로 22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남겨진 그의 일기장에는 근검절약, 봉사와 희생정신이 가득했다. 특히 “녹슬지 않는 못이 되어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일기속 그의 글은 나중에 유명한 문구가 됐다.

이듬해 3월 마오쩌둥(毛澤東)이 ‘레이펑 동지를 따라 배우자’’라는 교시를 내리면서 레이펑은 ‘국가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레이펑 학습의 붐이 대대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레이펑 사망 50주년과 권력교체기를 맞아 중국 당국이 ‘레이펑 정신’ 고취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사회의 도덕이 붕괴되고 사회적 불신이 심화되면서 정권안정이 위협받는 상황을 ‘레이펑 띄우기’로 개선해보려는 의도다.

그렇지만 봉사, 희생, 이타심을 정부가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난도 만만치않다. 정적 ‘레이펑 정신’을 배워야할 사람은 공산당 간부들이라는 냉소적 목소리도 들린다. 또한 레이펑이 중국 공산당의 필요에 따라 각색된 영웅이라는 비판도 있다.

국민들이 호응하고 주도하는 자율적인 캠페인이 되려면 레이펑 정신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한다. 예를 들어 ‘녹슬지 않은 못이 되겠다’는 것을 이제는 ‘프로 정신’으로 해석해 시대에 맞추는 것이다.

‘굴욕’이 아니라 더 멋있는 모습으로 레이펑이 대중과 마주할 수 있는 정제된 방안이 필요하다. 그가 ‘불의는 참을 수 있어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는’ 시대에 항거하는 영원한 ‘아이콘’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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