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 ‘지석마을그대가크레던스’
신탁사기 물건 63가구 1년 만에 공매 재개
피해자 400명·피해액 700억 추정
피해자들 명도·손해배상 청구 소송 ‘이중고’
[헤럴드경제(용인)=박로명 기자] 2021년 12월 한 겨울 밤 경기 용인의 한 아파트 단지. 이사를 하루 앞둔 김모 씨는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비어있어야 할 집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이미 이삿짐도 다 챙겼는데….” 김모 씨는 급한 마음에 경비실에 찾아가 “이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경비실에선 “어젯밤에 새로운 사람이 입주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김모 씨가 그동안 이삿짐을 챙겼다 푼 것만 4번. 1년 전 계약한 분양업체는 “입주를 시켜주겠다”는 말만 반복하며 시설 점검 등을 이유로 열쇠를 주지 않았다. 이미 분양업체에 1억5500만원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입금한 터였다. 공인중개업소를 수년간 운영하며 셀 수 없는 계약을 체결해본 경험이 있다고 자부한 김모 씨는 그제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김모 씨가 분양업체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그가 운영하는 공인중개소에 개발·대부업체에 소속된 분양팀이 찾아와 “입주를 못한 미분양 아파트를 50% 가격에 할인 분양한다”고 소개했다. 경기 용인에 위치한 58평 신축 아파트를 4억5000만원에 팔겠다고 했다. 마침 주변 신축 시세보다 1억원 가량 저렴했다. 아파트 단지 내 위치한 법무법인까지 나서 직접 전망이 좋은 고층 매물을 보여줬다.
분양업체는 ‘신탁물건’이라고 했다. 오랜 기간 공인중개사로 일했지만 신탁물건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김모 씨는 “중간에 변호사가 껴있으니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법무법인 측은 “소유권은 1순위 수익권자인 분양업체에 있다”고 설명했다. 김모 씨는 2020년 6월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아파트를 매입하기 위해 채권양도양수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 5500만원을 입금했다.
그러나 분양팀은 차일피일 입주일을 미뤘다. 계약한 동 호수가 아닌 다른 동 호수 입주를 제안했다. 그렇게 김모 씨는 수개월 간 분양업체 사무실에 찾아가 입주를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김모 씨는 본능적으로 “어디든 입주하지 않으면 권리 행사가 어려워져 큰일나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3년의 줄다리기 끝에 전세계약으로 전환한 후 계약한 동 호 수와 다른 곳에 입주했다. 그 무렵 김모 씨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피해자들을 만나 신탁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됐다.
“집에서 쫓겨나 수천만 원 배상 위기” 신탁 사기 아파트 63가구 다시 공매로
경기 용인 한 아파트 단지에서 발생한 신탁 전세·분양 사기 63가구의 공매 절차가 1년 만에 재개됐다. 피해자들은 수억원의 계약금과 전세금을 지급하고도 돈 한 푼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탁사가 피해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명도·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하면서 집을 비우고도 1인당 수천만 원의 배상금을 물어낼 위기에 처했다.
10일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운영하는 온라인 공매 시스템 온비드에 따르면 대한토지신탁은 지난달 23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에 위치한 ‘지석마을그대가크레던스’ 아파트 63가구에 대한 공매 공고를 올렸다. 가구당 최저입찰가는 6억9000만원에서 8억1000만원 수준으로 공매 규모만 수백억원에 이른다. 지난 3일 공매가 시작돼 차수별(5차까지)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오는 11일 3차 매각일을 앞두고 있다.
이 아파트는 2010년 준공된 554가구 규모 단지다. 사업 시행사인 지역주택조합은 준공 후 미분양이 발생하자 2011년 159가구에 대해 대한토지신탁과 담보신탁 계약을 맺었다. 이후 수년간 분양 한파가 이어졌고, 여러 개발·대부 업체를 거느린 A씨가 2015년 해당 아파트를 담보로 한 부실채권(NPL)을 매입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피해자들은 A씨가 파견한 분양팀과 불법 매매·임대차 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신탁 사기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담보신탁 제도를 악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신탁계약을 맺은 건물의 소유권은 신탁사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계약을 체결하려면 신탁사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A씨는 2016년부터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법무법인을 앞세워 피해자들을 안심시키는 방식으로 수백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피해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현재까지 피해자는 400여명 피해액은 최대 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피해 주택이 낙찰될 경우 명도 모든 책임은 낙찰자에게 돌아간다. 대한토지신탁은 공고문을 통해 “공매목적물에 대하 임차권을 주장하는 전입세대가 존재하나, 당사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다”며 “전입자가 주장하는 임차권의 근거인 임대차계약 등에 대해 당사는 동의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전입세대와 관련된 명도 등 일체의 모든 책임은 매수인이 부담한다”고 덧붙였다.
1년 만에 재개된 공매…피해자들 “언제 쫓겨날지 몰라”
앞서 신탁물건 159가구 중 63가구는 지난해 11월 공매에 나왔다. 대부업자 A씨는 부동산 활황기인 2021년 홍콩계 펀드인 SC로위(Lowy)로부터 추가로 700억원(2021년 담보가치)을 대출받으면서 기존 수익증권(미분양 159가구)을 담보로 제공했지만 원금과 이자를 납입하지 못했다. 이에 SC로위와 금전신탁을 체결한 수탁자 하나은행은 채권자의 요청에 의해 기한이익살실(EOD)을 선언, 대한토지신탁에 공매 절차 개시를 요청했다.
하지만 대한토지신탁은 공매 개시 후 며칠 만에 돌연 모든 절차를 중단했다. 신탁 전세·분양 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하면서 700억원을 대출해 준 SC로위가 부담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지난 4월 신탁사기 피해자들은 경기도의희를 통해 ‘용인 신탁·전세사기 피해자 구제방안 마련을 위한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며 인도소송 및 공매 절차 유예·정지를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이후 대한토지신탁은 수탁자인 하나은행에 요청에 의해 1년 만에 공매를 재개했다.
피해자들은 경·공매 절차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종인 피해자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피해자의 70%는 전세계약서가 없고 채권양도양수계약서만 체결해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며 “이미 주거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아파트가 공매로 나와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게다가 계약금이나 보증금을 날리고도 손해배상청구 소송으로 가구당 수천만원을 물어내야하는 상황에 내몰렸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한토지신탁과 하나은행은 채권자인 SC로위의 요청 없이 결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한토지신탁은 “공매 절차 개시·중단·재개 등은 하나은행(담보신탁의 우선수익자)의 요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주택 인도·손해배상 소송은 담보신탁 계약의 수탁자로서 선관주의 의무를 부담해야하는 당사 입장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현재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우선수익자의 요청으로 강제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나은행도 “용인 아파트 공매는 하나은행이 직접적인 채권자로서 요청한 것이 아니다”라며 “원 신탁 관계인등의 임대차와 무관하게 적법하게 체결된 별도의 신탁계약의 수탁자로서 수익자의 요청에 의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 신탁회사 소속 변호사는 “가장 큰 문제는 신탁 사기 피해 물건이 공매로 넘어가면 저가에 매각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일반적으로 감정가에 시작해 차수마다 10% 낮아져 저가로 매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계 펀드까지 껴있는 사적 계약으로 묶인 공매다보니 금융당국이 개입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만약 전세사기 특별법 등 국내 사유로 인해 대한토지신탁이 임의로 공매를 중단할 경우 채권자인 홍콩계 펀드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제는 커녕 피해자 입증부터가 어려워” 전세사기 피해자 울분
신탁 사기 피해자들은 집주인인 신탁사와 계약을 맺지 않아 최소한의 법적 보호조차 받을 수 없다. 피해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매매 계약서(채권양도양수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전세계약서상 동·호수가 일치하지 않는 피해자 수백명은 구제받을 길이 없다. 그나마 전세계약서를 작성한 피해자 30여명만 일부 피해사실을 인정받아 ‘전세사기 피해자 등’ 결정문을 받은 상태며 정부 지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이들은 전세사기 특별법상 일반 금융지원 및 긴급복지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경·공매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제한적이다. 적법한 권한이 없는 임대인과 계약해 경·공매에서 대항력과 우선매수권을 보장받지 못하며 이러한 권리를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위임할 수도 없다. 결국 전세사기 결정문 등을 받은 피해자가 LH에 피해주택 매입을 요청하면 LH가 권리관계 등을 검토·분석해 최종 결정한 후 공매기일에 제3자로 참석하는 방식이다.
박병석 국토부 전세사기피해지원단장은 “신탁사기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을 위한 4가지 요건 중 가장 중요한 1호(주택의 인도와 전입신고를 마치고 확정일자 갖춘 경우)를 형식적으로 갖췄지만 적법한 임대인과 계약을 체결하지 않아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다”며 “그럼에도 피해자가 일부 피해 사실만 인정받아도 LH와의 협의를 통해 피해주택 경·공매를 잠정 중단하거나 매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은 계약금과 보증금을 날리고 최대 1억원에 이르는 배상금까지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대한토지신탁은 피해자들이 아파트를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30가구씩 다섯 집단으로 나눠 순차적으로 명도·손해배송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 한 명당 거주 기간에 따라 월 122만원(43평)·149만원(48평)·165만원(58평) 등을 청구했다. 그동안 살았던 기간을 합산하면 적게는 1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을 배상해야 한다.
최근 2건의 소송에선 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지난 5일 수원고등법원 민사2부(이수영 부장판사)는 “피고들이 임대차 계약에 따른 보증금을 지급했더라도, 소유권자인 원고(대한토지신탁)에 대해 피고들이 점유의 적법한 권원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며 “각 부동산의 소유자인 원고는 피고들의 무단 점유로 차임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나머지 3건은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탁등기된 부동산을 계약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탁된 주택을 임차하는 경우 등기부등본만으로 임대인이 임대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워서다. 한 신탁회사 소속 변호사는 “신탁 관계를 확인하려면 신탁원부를 보고 계약 구조를 해석해야 하는데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가급적이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신탁 주택의 임대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신탁원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