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 생보사 해약환급금 39조
저신용 서민 보험약관대출 증가
한은, 실물경제 ‘심리 위축’ 언급
#자영업자 A 씨는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비 등이 부족해 대출을 알아봤지만 은행에서의 대출은 거절당했다. 아이 앞으로 들어둔 보험을 담보로 약관대출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해왔지만 이마저도 부족해 결국 계약을 해지했다. 더 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서민들이 안정적 미래를 위해 마련한 최후의 ‘안전핀’이 뽑히고 있다. 십여 년 가까이 보험료를 넣고도 당장의 생활비조차 마련하지 못해 해약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다. 이 여파로 생명보험 해약환급금 규모는 9월 기준 40조원에 육박한다. 보험 특성 상 중도해지는 손해보는 구조지만 서민들로서는 눈물의 결단이다. 특히 대출이 막힌 중·저소득층에서 해지가 더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 심상찮다. 그만큼 민생경제가 위태롭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탄핵정국으로 가뜩이나 얼어붙은 경제심리가 급속도로 위축될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소득·소비·고용 등 실물경제 전반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관련기사 8·9·10·20면
16일 생명보험협회 통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생명보험사의 해약환급금 규모는 39조3648억원으로 40조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올해 ▷1월 5조3034억원 ▷3월 14조8209억원 ▷6월 27조1558억원에 이은 급증세다.
보험료 미납으로 인한 효력상실 환급금도 증가세를 보인다. 효력상실 환급금은 보험 가입자가 보험료를 2개월 이상 내지 못했을 때 보험사가 해지를 통보하면서 지급하는 금액으로, 비자발적 해지를 의미한다. 생보사 효력상실 환급금은 3분기 기준 1조2609억원으로 지난해 1조2128억원보다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 말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할 전망이다.
보험은 해약하면 무조건 손해를 보는 구조다. 손해를 보면서도 보험계약을 해지하는 사례가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민들의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는 방증이다. 보험 해지 증가는 보험사 입장에서도 악재다. 새 회계제도(IFRS17)에서는 계약유지율이 수익성 지표인 고객서비스마진(CSM)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보험 유지율이 하락하면 보험사들의 건전성과 실적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보험약관대출도 보험 해지 증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가입 중인 보험을 담보로 대출받는 보험 약관대출의 이용자 수는 3분기 기준 88만3213명으로 1년 전(67만6459명)에 비해 31% 늘었다. 보험약관대출은 별도 심사 절차가 없어 신용도가 낮은 서민들이 급전이 필요할 때 이용하는 일종의 ‘불황형 대출’로 불린다. 연체하면 보험료와 이자를 이중으로 내야하고, 연체 금액이 해지환급금의 일정 범위를 넘으면 보험계약이 해지될 수 있는 만큼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이 주로 이용한다. 약관대출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금리 인상 여파와 경기침체로 취약 차주들의 수요가 늘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대출금을 갚지 못해 비자발적 해지로 이어지는 경우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윤석열 정부 들어 인플레이션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다 보니 경기 침체로 서민들의 실질소득이 줄고, 소비 여력이 축소됐다”며 “대출규제까지 맞물리면서, 사면초가가 된 서민들이 보험, 정기예금 등을 해지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국회 가결 다음날인 15일 내놓은 ‘비상계엄 사태 이후 금융·경제 영향 평가’ 보고서에도 현재 국내 경제를 향한 우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은은 “실물경제 측면에서는 경제심리 위축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그 영향을 관리할 필요가 증대됐다”고 밝혔다.
한편 금융위원회는 이번주 카드수수료 경감 방안 등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병환 금융위 위원장은 16일 오전 간부회의에서 “소규모 자영업자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예정대로 카드수수료 경감 방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서지연·정호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