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설이 도는 장쩌민(江澤民ㆍ85) 전 중국 국가주석은 1989년 이후 15년 동안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는 1926년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에서 태어났으며, 공산당 간부 자제인 태자당 출신이다.
상하이 교통대학 재학시절 상하이 학생운동권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지하당 운동을 하던 1946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5년 구소련 모스크바에 유학한 뒤 귀국, 창춘의 제1자동차 공장 엔지니어와 국무원 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 부장을 거쳤다.
1966년 문화대혁명 직후 당과 공직에서 추방돼 10년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출세의 계기는 1985년 7월 상하이 시장이 된 것. 상하이를 중국 최고의 경제·금융도시로 키운 공로로 87년 공산당 13기 정치국원에 선출되면서 중앙정치무대에 발을 디뎠다.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당총서기 자오쯔양이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그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를 맡았다. 그해 11월 중국의 최고권력자 덩샤오핑이 맡고 있던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았다.이듬해 4월에는 국가군사위원회 주석을, 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겸직, 당과 군, 정부의 전권을 장악했다.
막후 실세였던 덩샤오핑이 1997년 2월 세상을 떠나자 장쩌민 주석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시 출신의 간부들로 구성된 ’상하이방(上海幇)’을 적극적으로 챙겼다.
2002년 11월 당총서기, 2003년 국가 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순차적으로 물려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그는 외국어에 능통한 상하이방의 수장답게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져, 외교무대에서 미국의 팝송을 즐겨 부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서방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서방전분가들은 장쩌민이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키운 장본인이라고 인정하기도 하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은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의 작품이며 그의 능력이 과대포장됐다는 인색한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권도경 기자/kong@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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