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끝까지, 죽을 때까지(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몬테카를로 랠리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은 출발부터 핸디캡을 안고 시작해야 한다. 지난 시즌 드라이버 챔피언부터 선두로 스타트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처녀출전 한 호크아이 팀의 유호성과 그레이스 팀의 권도일은 거의 마지막 순서로 스타트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선두그룹이 지나가고, 잠시 후에 엔진에서 불을 뿜으며 두 번째 무리가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식으로 세 번째, 네 번째 자동차 무리가 스쳐지나갔지만 아직도 유호성이나 권도일이 모는 자동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거 뭐야? 호성이 녀석은 어째서 나타나질 않아? 경기 시작부터 본때를 보여야 되는 거 아니에요?”
“시작부터 밀리는 모양입니다. 스케이팅의 모태범 선수건, 수영의 박태환 선수건 스타트가 좋아서 메달을 탔는데… 이건 스타트가 젬병이로군.”
“조용히 하세요, 염장 지르지 말고!”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성 군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기필코 막아야 한다더니… 금세 마음이 변하셨습니까?”
초조한 마음 때문일까? 신희영과 강준호가 공연히 말꼬리를 잡아가며 다투고 있을 때 문득 독특한 형상의 머신 한 대가 그들의 눈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낡은 차, 마치 녹슨 드럼통을 펼쳐 만든 것 같은 자동차에는 웬걸,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한 모습이 담겨 있질 않은가. 거성 그레이스 팀의 권도일이 모는 1974년산 치타였다.
“왕회장님! 저거요, 저게 우리의 라이벌 찹니다. 우리 유호성 선수는 도대체 어디쯤 오는지 알 수 없군요.”
“아이, 시끄러워요. 가로걸리니까 저리 비키기나 하세요.”
천 부장이 수다스럽게 목청 높여 소리쳤다. 물론 신희영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녀는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신경질로 맞받았지만… 아! 당당하게,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1974년산 치타의 모습을 보며 유한솜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에 사로잡히는 중이었다.
‘도일 씨, 이젠 죽도록 달리겠죠? 죽도록…’
어느새 까만 점으로 사라진 1974년산 치타는 멀찌감치 보아도 고물깡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머신의 겉모습이 고물이라고 선수마저 고물일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권도일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
“이제야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호프 유호성 선수! 어라? 그런데 저건 뭐하는 거지요? 코-드라이버가 차창에 매달려서 우산을 펴고 있어요.”
권도일이 달려 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유호성의 머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방송 중계차들이 떼 지어 몰려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호성은 꼴찌로 달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 와중에 이건 또 무슨 짓인지… 차창 밖으로 상반신을 반쯤 내민 채 은빛 우산을 펼치려 애쓰는 코-드라이버 때문에 차는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 미쳤어! 저게 뭐 하는 짓일까요? 강 프로님.”
“글쎄 말입니다. 스피드를 내야 할 판에 우산을 펴들면 어쩌라고…”
귀신이 아니고서야 왜 그러는지 알 까닭이 있을까? 조명! 이를테면 촬영용 반사판을 세워 프로필을 살려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아직 해가 동쪽사면으로 기울어 있는 아침나절이었기 때문에 역광을 받아 드라이버 유호성의 얼굴이 검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레이싱 상위권에 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유호성, 특히 전진후에게는 이번 랠리의 모든 실황을 생생히 담아 낼 촬영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스타트를 보기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를 뚫고 달려 나가는 유호성의 모습은 극적이었다. 그 극적인 순간의 촬영을 역광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호성이 모는 재규어 XKR은 그렇게 느릿느릿 굴러갔다. 그러나 알미늄으로 만들어진 차체는 태양빛을 받아 어찌나 번쩍이는지 보는 이들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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