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바람 부는 길(30)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염병!”

유민 회장은 아예 욕을 입에 달고 지내는 중이었다. 그럴만하겠지. 일간신문, 방송, 주간지, 심지어 지하철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무료신문에 이르기 까지 유민 회장 일가에 대한 이야기가 며칠째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혜 씨? 오랜 만예요.”

“어머나, 회장님. 어쩌면 보름동안 전화 한 통도 없으셨어요?”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유민 회장이었다. 지극히 보편적인 질문과 일반적인 답변으로 이어지는 전화통화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수화기를 마주잡은 두 사람의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양은혜… 술에 취해서 들은 이름이지만 800억 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소유한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융자 잡히면 800억 원은 쉽게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민 회장은 그 이름을 아예 양팔백으로 외우지 않았던가.

800억 원을 빨아내려면 최소한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세트는 선방으로 찔러줘야 할 것이다. 그러니 선방으로 드는 경비가 대략 2천만 원 쯤 되겠지. 까짓 2천만 원이야 800억 원에 비하면 0.002%를 조금 넘기는 껌 값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깝지. 천만 원 한 장만 써야겠어. 그러려면 감정에 호소하고 마음부터 후려야 할 걸? 어쩐다? 젊은이들처럼 전광판을 빌려서 사랑고백 이벤트라도 벌여? 그런 뒤에 백화점으로 가서 6부 쯤 되는 다이아몬드로 때워?’

이건 랠리경기 자금을 쉽게 마련하려는 유민 회장의 복잡한 생각이었다. 물론 전화기 맞은편에 있는 양은혜의 생각도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늘은 저 늙다리가 무슨 짓을 하든 감동연기만 해줘야겠어. 눈곱만한 ’다이아먼지‘라도 얻으려면 매사에 감동한 듯 펑펑 울어야겠지? 그래야 경제성이라곤 빵점인 러시아 저질 광산을 떠안기고 단돈 얼마라도 투자를 받아낼 수 있겠지. 대충 사, 오억 원이면 인생이 바뀌는 거금 아니겠어?’

같은 물건을 놓고 서로 다른 잡생각이 앞서다보니 수화기에 대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수화기를 귀에 건 채 둘이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 까닭이었다. “따님이 옷도 벗고, 그것도 모자라서 플래카드를 들고 공개적으로 회장님을 매도하는 모습을 볼 때엔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그걸 본 내 심정은 오죽하겠어요? 20년 넘게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그렇게 미칠 줄을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내가 피눈물을 흘린 건 아들 때문입니다. 신문에 난 기사 읽어보셨지요?”

“읽다마다요. 아드님을 레이싱 선수로 키우려고 무지하게 많은 투자를 하셨다면서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엄마 곁으로 가서 골프선수가 되려 한다니… 신문기자가 잘못 넘겨짚은 건 아닐까요?”

“사실입니다. 타이거 우즈 선수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꾐에 빠진 거겠지요. 강유리인가 뭔가 하는 여자의 말에 홀랑 넘어간 겁니다. 하긴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꼴찌를 했으니 외롭기도 했겠지요. 그 심정 나도 알만 합니다. 나 역시 외로우니까요.”

“외로우시면… 만나야지요. 당장.”

“그럽시다. 마음도 허한데… 오늘 만나서 진하게 술이나 마십시다.”

양은혜가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담보로 800억 원을 융자받을 수 있다는 말, 그리고 유민 회장이 여당의 대선주자와 호형호제하며 지낸다는 말은 과연 어떻게 생겨난 말이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다. 술에 취해서 부풀려진 방송사 상무의 립싱크를 액면가대로 받아들인 것인데… 그 주정뱅이의 근거 없는 말 때문에 두 사람은 진실게임처럼 묻고 대답하는 지루한 과정도 없이 서로를 홀랑 믿어버린 셈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