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바람 부는 길(36)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그녀가 욕조로 들어설 때에 사방으로 튄 것은 더운 물 만이 아니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흩어져버린 낭만… 나긋나긋한 몸매를 따라 흐르는 간결한 민소매 드레스 속의 절세미인 오드리 헵번의 모습도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야 말았다.
“어이쿠, 살살 들어가시지… 어찌 그리 첨벙 뛰어 들어갑니까? 텔레비전 화면까지 물이 튀어서 엉망이 되었어요.”
아! 색즉시공! 색(色)이란 형체를 갖춘 만물을 말하며, 이 만물은 모두 일시적인 모습일 뿐 그 실체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공(空)이라는 뜻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이니 어렵기로는 공자님 마씀 뺨치겠지만… 이제 방금 화끈하게 드러날 뻔했던 오드리 헵번의 나신이 물방울에 일그러져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회장님은 옷을 입었고, 나만 벗었는데… 무슨 재간으로 살살 걸어서 들어가요? 창피하단 말예요.”
아! 이번엔 공즉시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 현상 하나하나가 그대로 실체라는 말이다. 역시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풀어보면 이 말 역시 별것도 아니다. 눈 비비고 정신 차려 바라보니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여인이 눈앞에 있더라는… 그런 뜻과 다름없었다.
“그렇지. 대단히 미안해요. 나도 벗을게요.”
호텔방은 무려 23층 높이에 있었고 사방은 유리로 트여있었다. 커튼도 모두 열려있었기 때문에 안과 밖이 훤하게 통해있었다. 7성급 호텔의 매력은 이런 데에 숨어있었다. 자연 속에서, 하늘 한 가운데에서 양은혜는 알몸으로 물에 잠겨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발뒤꿈치에도 닿지 못하겠지만 오드리 헵번이 ‘공(空)’이라면 양은혜는 확실하게 실체를 드러낸 ‘색(色)’이었다.
“마치 하늘폭포에 와 있는 것 같지요? 우리가 나무꾼과 선녀처럼 여겨져요. 정말 꿈만 같다니까요?”
염병, 그럼 나는 허접한 나무꾼이란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민 회장은 허허! 사람 좋은 척을 해야만 했다. 800억 짜리 사업이므로 모든 걸 감내해야 마땅했다. 까짓 거, 아무러면 어떠랴? 지겟작대기로 팽이를 돌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이런 생각을 하며 유민 회장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첨벙첨벙! 하늘폭포 같은 욕조로 들어서서 물장구를 치고 있자니 슬슬 지겟작대기에 감흥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자, 그럼 아기를 세 명 나을 때까지… 합시다.”
“벌써요? 이 아름다운 욕조에 좀 더 있으면 안돼요?”
“지금이 밤 12시 하고도 20분예요. 언제 하고… 언제 잡니까? 마음이 자꾸 조급해 진다니까요?”
“내일 새벽비행기를 타려면 어차피 잠을 잘 수 없어요. 아무리 공항이 10분 거리에 있다지만 새벽 4시에는 도착해야 하니까… 겨우 서너 시간 자느니 아예 밤을 새우자고요. 노세~ 노세~ 밤새워 노세, 얼마나 좋아요?” 양은혜도 어쩌면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난 10여 년간 체증처럼 가슴 한 가운데에 얹혀있던 저질 광산사업에 이제야 서광이 비친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그 서광을 몰고 올 사람이 바로 유민 회장 아니던가. 그런 사람을 만난 것부터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자, 앞으로 세 시간 동안 회장님은 내 노예가 되는 거예요. 나는 상전이라고요. 지금부터 나를 한껏 기쁘게 해봐요. 감동 먹을 때까지 헌신하라고요.”
여자에게 헌신할수록 희열을 느끼는 동물이 남자라는 것을 양은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유민 회장 위에 왕으로 군림할 예정이었다. 헌신의 시작은 복종인가? 그녀는 유민 회장을 무릎 꿇려 바닥에 앉히고는 그의 어깨 위에 한쪽 다리를 걸쳐 올렸다. 물에 젖은 다리가 그의 어깨 위에 꿈틀대는 뱀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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