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모(純毛) 그리고 치명적인 사랑(Pure laine vierge: l`amour a mort)

에로틱한 모든 행위 중에서 순모, 모헤어 혹은 앙고라에 대한 페티시즘은 가장 불안스러운 형태의 페티시즘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아주 관능적인 이런 소재들과 접촉하면서 사람들은 시간증(屍姦症)과 관련을 맺게 되기 때문이다.

마이스페이스의 ‘버진 울(Virgin wool)’ 페이지에는 환상으로 가득 찬 한 남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해 올려놓고 있다.

그는 거리를 지나가던 어떤 여성과 마주친 후 뒤를 쫓는다. 이유는 그녀가 입고 있는 순모 스웨터 때문이다. 몸에 밀착된 하얀 스웨터는 올이 뚜렷하고 선명하다.

젊은 여성이 추위를 잘 타는 타입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둥글게 만 칼라가 거의 턱을 감싼 상태에서 그녀는 수상쩍은 미지의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내면서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남자가 “나는 너무나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라고 진심어린 고백을 하자 여자는 니트 전문 부티크로 들어간다.

그녀가 옷을 벗으려 하자 남자는 “아니, 아직은 안돼요”라며 오히려 제지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몸을 밀착시킨 후 스웨터를 천천히 애무한다.

하지만 상황은 악몽으로 돌변한다. 남자는 여성의 손을 결박하고, 가위를 꺼낸 후 인체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에 걸친 속옷과 그 주변의 양모 스웨터를 오려내기 시작한다. 또 둥글게 만 칼라를 밀어 올려 그녀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린다.

겁에 질린 그녀가 두려움 때문에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여자에게 전에 없는 쾌락을 맛보게 해준다. 문자 그대로 공중에 떠서 여자가 황홀경을 느끼도록 하는 매혹적인 쾌락을.

순모 속에서 여자는 고치 모양으로 변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자궁을 연상시킨다. 태아 형태로 구부린 남자는 혼자서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타래가 풀린 순모 더미를 껴안으며 몸을 둥글게 웅크린다. 마이스페이스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에마뉘엘 말레르브(Emmanuel Malherbe)의 이 영화는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 이미 느꼈던 공포를 일깨워 준다.

사람들은 ‘푸른 수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만난 모든 여성을 죽이고, 그들 시체를 한 방에 몰아넣어 보관하는 인물이다. 또한 작가 모파상(Maupassant)의 시간증을 다룬 단편소설 ‘머리카락’도 있다. ‘머리카락’ 속의 화자(話者)는 정신병을 치료하는 의사다.

의사는 자신의 한 환자에 대해 들려준다. 환자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금발머리의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한 후 장롱 속에 여자를 집어놓고 열쇠로 잠근다. 그렇게 여자를 감금시킨 뒤 다시 끄집어낸 후 애무하는 기괴한 행동을 한다.

또 프랑스 석학이자 철학자인 미셸 세르(Miichel Serres)는 자신의 저서 ‘오감(五感)’ 속에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려내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비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염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자의 시신을 즉시 넘겨주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사람들이 이미 숨을 거둔 여성의 매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미라가 된 후 그녀는 곧 상자 속에 들어가 밀봉되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영원히 보존된다고 한다.

미셸 세르는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사자들을 ‘보관’하는 이러한 고대 전통이 사라졌다고 덧붙인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텅 빈 무덤을 자신의 뒤에 남겨 놓게 된 이후 시신의 방부 처리와 보존은 전통적인 장례식의 일부를 구성하는 데 그치게 됐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사회에서도 이교도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차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소중한 보물과도 같이 시신을 보존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하던 여인이 입던 폭신폭신한 스웨터, 비단처럼 윤기 나는 머리카락, 마치 살갗처럼 부드럽고도 온기가 있는 천조각 등 이미 떠나버린 인간이 남겨 놓은 물건들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석관(石棺)과 유사하게 생긴 상자 속에 그 물건들을 소중히 보관한다. 상자들은 그들의 성적 환상을 보관하는 마법의 공간이다. 시간의 흐름을 폐기시키기 위해 그들은 마치 무의식의 블랙박스처럼 그 상자들을 간간이 열어보는 것이다. (이미지는 영화 ‘버진 울’의 장면)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