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지배’(La domination masculine)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저서 ‘남성 지배’에서 따온 벨기에 영화감독 파트릭 장(Patric Jean)의 최근 다큐멘터리는 폭발적인 반응을 낳았다. 왜 남자들이 현재 사회의 대부분 영역에서 여성들을 지배하는 것일까? 이러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폭력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기존 사회는 대부분 가부장적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남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파트릭 장이 만든 극도로 논쟁적인 다큐영화는 소년들이 ‘지배적인’ 수컷으로 변하도록 유도하는 메커니즘을 단계별로 보여준다.

영화는 정신의학자 세르주 헤페즈(Serge Hefez)의 상담으로 시작된다. 한 무리의 성인을 대상으로 9개월 된 갓난애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소녀가 울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라고 물어본다. 사람들은 “아이가 슬픕니다.

아이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달래줄 필요가 있겠는데요“라고 대답한다. 동일한 비디오테이프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사내 아이가 울고 있다며, 왜 그런지 묻는다. 사람들은 “애가 방해를 받았군요. 무얼 원하고 있네요. 화가 난 상태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감정 표현임에도 사람들은 소녀에게 희생의 세계를, 그리고 소년에게 행동의 세계를 투사하는 것이다. 세르주 헤페즈는 “소녀들은 부드러워야 합니다. 슬픔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일정한 방식에 복종해야 합니다. 반면 소년들은 화를 내면서 자신들 존재를 확인하죠”라고 결론짓는다.

다음 장면에는 한 장난감가게가 등장한다. 소녀 코너에 진열된 장난감들은 분홍색이며, 달콤한 과일 향기를 풍긴다. 소녀들을 위한 제품들은 바비 스타일의 핀업걸 모습이나 반죽과 다림질을 하는 가정주부 모습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반면 소년들을 위한 코너는 자신들을 정글 속에, 중세 속으로,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속으로, 배트맨의 자동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장난감들로 채워져 있다. 변장 코너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녀들을 위한 물건들은 주로 공주옷이다. 무도회에서 가장 아름답기 위해서다. 그와 반대로 소년들을 위한 물건들은 슈퍼히어로, 우주, 경찰, 카우보이 들이다.

세 번째 장면. 아동용 도서의 이미지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한 소녀가 창문에 기대 유리창 너머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교사인 에블린 레오나르가 설명한다. “창문은 꿈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소녀들은 꿈꾸도록 예정된 존재입니다. 소녀들은 야망 대신 꿈을 가지고 있지요. 그녀들은 관객들이자 매혹적이고 우수에 잠긴 왕자들을 기다리는 공주들입니다.”

다른 용어로 표현해보자. 아빠는 밖을, 엄마는 안을 지킨다. 남자는 세상을 바꾸고, 여자는 세상을 꿈꾼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아이가 진로를 결정하는 데 관심을 둔다. 소년들에게는 정치와 과학을, 소녀들에게는 커뮤니케이션과 심리학을 권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마리 쇼츠(Marie Schots)는 직업 관련 서적들을 특히 비판한다. “직업의 선택이 아주 일찍부터 존재를 결정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어린이도서에서 무엇을 볼까? 비즈니스맨인 남성과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성밖에 없다.

파트릭 장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사람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남자의 개성을 더, 여자의 개성을 덜 개발시킨다는 단순한 전제에서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멀리 나아간다. 그에게 남녀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남근이 앞으로 돌출한 원칙에서 출발해 많은 ‘남성주의자’(페미니스트의 반대 의미)는 남자가 자신의 잠재적 폭력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한다. 남자란 정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남자가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한다.

유전학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런 논리에 신뢰를 표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남자들이 유전학적으로 여성보다 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지 알아내기 힘들다.

남녀 가릴 것 없이 폭력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에서 기인한다. 폭력은 인간 충동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러한 충동들을 제어하고, 그것을 승화시키며, 건설적인 그 어떤 것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문제는 일부 개인이 자신들의 폭력을 가장 낡아빠진 방식으로 구사할 때다.

소리 지르고, 위협하며, 타인을 파멸시키기 위해 끔찍한 발언들을 내뱉는다. 때로는 구타하기조차 한다. 바로 그 때문에 파트릭 장은 부부 사이의 폭력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관심을 둔다. 평균적으로 여성은 사흘마다 죽으며, 분마다 얼굴을 가격당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매맞는 남성들 문제를 도외시한 채 그는 오직 남자들만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집중한다.

하지만 다음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부부 사이에서 여성들만이 덜 공격적일까? 어떤 이유로 여성의 폭력성은 전혀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러한 폭력이 은밀한 방식으로, 언어를 통해, 덜 신체적으로, 눈에 덜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일까?

희생자들이 고소하지 않기 때문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폭력이 구타와 상처보다 식별해내기가 더 어렵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파괴적일까?

여성 폭력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면서 파트릭 장은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흥미로울지라도 그의 다큐멘터리는 편들기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폭력을 고발하는 데 지나치게 몰두했기에 감독은 남자들을 악마시하고 만다.

하지만 가장 폭력적인 남자들조차 희생자들이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장 큰 페니스, 가장 큰 자동차를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은 남자를 교육시킨다. 또 리더, 초인적인 수컷, 지도자이자 보호자가 돼야 한다고 남자들의 조건을 규정한다.

부부 사이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이야기다. 전혀 지배하지 못하면서 주먹질을 일삼을 뿐이다. 폭력은 지배와 정반대 의미다. 무기력의 고백이다. 여성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여성을 지배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여성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때리거나 욕설을 퍼붓는 남녀들은 아무것도 제어하지 못한다.

그들을 통제할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 해결책이 없는 자들이다. 소통이 불가능한 자들이다. 여성을 때리는 남자, 남자를 때리는 여자는 지배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파트릭 장의 영화는 실패작이다.

파트릭 장의 인터뷰는 ‘세컨드섹스닷컴’ 사이트에 올라가 있다.

(이미지는 다큐멘터리 필름 ‘남성 지배’ 포스터)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