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 붉은 길, 푸르른 마음 (2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아하! 이런…”
스마트 폰의 메모리 기능이 작동된 연후에야 권도일은 김지선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어 시간 전에만 기억해 냈더라도 만사 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을 터였다.
코-드라이버인 그녀와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당당히 3등으로 입상한 직후, 권도일은 에어 뮬과 X-호크 개발 건 때문에 성지 순례 단을 가장하여 이스라엘로 잠입해 들어가지 않았던가.
포디움에 올라 트로피를 받고, 샴페인 쇼를 마치자마자 즉시 호출되었으니 그녀와 회포를 풀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내 소속사인 거성그룹에 중대하고 화급한 일이 생겼어요. 꼭 내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는데… 옷 갈아입을 여유도 없다는 군요. 미안하지만 급히 다녀올게요. 와서 진하게 한 잔 합시다.’
마침 그녀는 라커룸에서 드라이빙 수트를 벗던 중이었다. 라커룸은 남녀가 유별한 공간이었으므로 그는 김지선에게 이런 쪽지만을 남기고 급히 거성으로 차를 몰아야만 했다. 어떤 화급한 일이기에 옷 갈아입고 샤워하는 동안, 30분도 기다리지 못했을까…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허탈함마저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교롭다는 것이다. 이제 20분쯤 뒤엔 정보요원들이 들이닥칠 테니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구구절절한 내막을 그녀에게 전화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데 또 한 번 약속을 어겨야만 했으니 가슴 아플 따름이었다.
문득 몬테카를로 랠리경기 중에 브로우(brow) 지역을 달리던 그 날, 그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브로우 지역 즉, 노트에 표기할 수도 없을 만큼 험한 길을 후진으로 달리던 그는 문득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란 충동에 빠져 들었지. 아! 지선 씨, 내가 왜 이렇게 미쳐가는 걸까… 그리고는 혼절하듯 그녀의 무릎 위로 엎어지고야 말았지. 1974년 산 치타의 보닛 틈으로는 희뿌연 수증기가 무럭무럭 새어나오고… 자, 이리 와요. 억세게 운도 없는 오빠! 그녀, 김지선은 몸을 돌려 앉으며 천천히 팔을 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지.
그녀는 두 손으로 조용히 그의 얼굴을 감쌌고, 그는 드라이빙 글러브를 벗어던진 채 맨손으로 그녀의 가슴께를 더듬기 시작했지. 잠시 부들부들 떨리던 그의 손이 서서히 그녀의 드라이빙 수트를 헤치고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지. 잠시 후 그녀의 젖가슴에 느껴지던 서늘한 촉감…
“안녕하십니까?”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던가? 권도일이 김지선의 젖가슴을 애무하던 기억에 찬찬히 빠져들고 있던 중에 어김없이 그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회장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시각은 12시 정각이었다. 감색 정장차림, 노트북이 담긴 검은 백을 든 모습… 마치 틀에 찍어낸 것 같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높은 양반이 전화로 일러주었듯이 정확히 5분에 걸쳐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 세워진 승용차를 향하여 걸어 나갔다.
“아버님,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직 이스라엘과 얽혀있는 문제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일단 백지상태로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침 재벌 2세는 아버지에게 전화로 하직인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그 찍어낸 것 같은 정장차림의 젊은이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다녀오너라.”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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