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교류 34배·인적교류 50배 급증 허허벌판 ‘望京’ 한국인 거주 20년 지금은 ‘베이징의 부촌’으로 대변신

90년대 中 파견직원 이사짐속엔 화장지·화장품 등 생필품 가득 현재는 위안화 환율에 더 빠듯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왕징(望京)은 지난 20년간 이어온 한·중 교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왕징은 한국인의 거주가 시작되면서 지금은 수많은 아파트단지와 상가,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베이징의 부촌이 됐다.

아직도 이곳에선 건물들이 비 온 뒤에 쑥쑥 크는 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다. 왕징의 아파트단지 간랑청(橄欖城)과 바오싱위안(寶星園) 사이에 위치한 포스코차이나 본사건물 ‘포스코센터’의 건설공사도 한창 진행 중이다.

20년 전 중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왕징에 정착한 정철(47) 사장은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면서 “그동안 한·중 관계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불릴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중 수교 초기부터 중국 대륙을 누벼왔던 다른 1세대 재중 한국인들의 감회도 비슷하다. “20년 전하고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고 한국과 중국은 여러 면에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경이로운 경제 성과, 전환점 필요=“문은 닫혀 있으나 빗장은 걸려 있지 않다(關門但不鎖上).” 1980년대 초 황화(黃華)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묻자 한 말이다. 1992년 8월 24일 양국은 한ㆍ중 수교 공동성명을 체결하면서 이 빗장을 벗어던졌다. 이로부터 20년, 양국은 이제 빗장을 논하는 단계가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였다. 세계 외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결과다.

특히 경제 측면에서의 발전은 경이적이다. 교역액은 수교 당시 64억달러에서 2011년 2200억달러로 34배가 증가했다. 인적 교류는 13만명에서 2011년 650만명까지 50배가 늘었다.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한국 제품은 다시금 경쟁력을 찾았고, 중국은 한국의 투자와 기술을 유치해 고속 성장을 일궈냈다.

중국은 우리나라 최대 교역대상국이 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 대외교역 총액의 20%를 차지한다. 대중국 수출은 1992년 26억5000만달러에서 2011년 1341억6000만달러로 50배, 중국산 수입은 37억3000만달러에서 864억3000만달러로 23배 각각 늘어났다.

특히 대중국 수출 증가율은 연평균 22.9%로, 같은 기간 전체 수출 증가율 11.0%의 배나 됐다. 중국은 2003년 이후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기준 대중국 수출액이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40% 더 많았다. 대중국 수입 역시 급증해 중국은 2007년 이후 일본을 추월해 우리나라 제1의 수입국에 올랐다.

양국 교역에서 재미를 본 쪽은 우리다. 수교 연도를 제외하고는 줄곧 흑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대중국 무역흑자는 477억5000만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무역수지 흑자(308억달러)를 크게 넘어섰다. 대중국 무역흑자가 다른 나라에서 생긴 적자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중국에 있어서도 한국은 홍콩과 대만 등 중화권을 제외하고 최대 투자국이다. 2010년 말까지 한국의 대중 누적투자액은 313억8000만달러에 이르렀다. 우리가 중국의 고속 발전에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준 셈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우리에게 ‘양날의 칼’로도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면 우리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됐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지면 한국의 경제성장률도 0.4%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계산했다.

또 중국의 임금이 증가하고 우리와의 기술 격차가 좁혀지면서 더 이상 제조업 생산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대중국 수출 품목을 가공을 위한 중간재에서 내수시장 공략을 위한 고급품으로 재편해야 하는 전환점을 맞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때가 된 것이다.

▶20년 동안 생활상도 변화=1990년대 중국 파견직원의 아내는 끌려가는 심정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눈물을 흘렸다. 이삿짐에는 화장지에다 비누, 화장품, 냄비 등 기본 생필품으로 꽉 찼다. 하지만 몇 년간의 파견근무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 주재원의 아내는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저렴한 인건비 때문에 가정부에 운전사까지 쓰는 귀부인 생활을 하다 20평짜리 녹물 나오는 한국 아파트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중국으로 발령 난 직원의 이삿짐은 훨씬 가벼워졌다. 웬만한 생필품은 한국과 비슷하고, 한국산보다 더 품질 좋은 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한국 못지않은 높은 물가며, 위안화 환율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더 빠듯하다. 집세가 얼마나 많이 올랐는지 전임자가 누렸던 호사는 생각지도 못한다.

중국의 고속 성장이 주중 한국인에게 가져온 변화다. 부자나라 취급받던 한국인이 이제는 중국인의 씀씀이에 입이 딱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한국인의 생활도 실사구시로 바뀌고 있다. 도피 유학이 주를 이루던 중국 유학도 중국 전문가를 꿈꾸는 인재의 목적지로 바뀌었다. 저렴한 인건비, 거대한 시장만 바라보고 차이나 드림을 꿈꿨던 한국인은 그동안 시련과 성공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해가고 있다.

<박영서 베이징특파원·한희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