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하나로! 20
눈을 뜨니 익숙한 방이었다. 구식으로 배치된 가구들만 보아도 몇 시간 전에 여장을 푼 평양호텔임에 분명했다. 벨벳으로 드리운 커튼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것은 분명 대동강의 야경이었다. 잔잔한 물결 위로 호텔 옥상의 조명등이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제법 밤이 이슥한 모양이었다.
권도일은 그제야 옆자리에 함께 누워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창가를 되비쳐 들어오는 나약한 불빛에 그녀가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있었지만 단아한 이목구비에서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기막혔다.
“당신… 예원희 씨? 어쩐 일로 여기에 누워 있지요?”
“두 시간 넘게 저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조금 전에 침대로 올라왔단 말이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무슨 뜻이지요? 그게?”
“순엉터리 남자라는 뜻이지요. 여자 혼자 남겨두고 제풀에 곯아떨어지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그것도 두 시간이 넘도록.”
아하!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뾰로통한 표정 위로 두 시간쯤 전에 진지하게 다짐을 받던 도형철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내 동생 도종호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조선에서 세계적인 꼴푸선수로 거듭날 수 있도록 스뽄서가 되어 달라고 말입네다. 이번에 열리는 외국인 혼합 아마추어 꼴푸대회에서도 당당히 입상할 수 있도록 뒷돈을 대 달라는 것이외다.”
도형철은 분명히 그렇게 요구했다. 그는 복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셈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서열이 한참 아래였던 공병 제6사단장에게 서열 윗자리를 양보한 것부터가 영 배알이 꼴리는 일이었다.
“남조선의 재벌과 줄이 닿아 있으면서 그걸 여태껏 활용하지 못했단 말이외다. 그 얼마나 답답한 일입네까? 그런 까닭에 오늘 권도일 선생을 찾아왔소. 속도전 자동차 경주를 위해 12차로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돈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만 꼴푸에 투자하라고 해주시오. 부탁입네다.”
도형철은 이렇게 속을 터놓으며 맥주를 마셔댔다. 그러니 권도일인들 어찌 마시지 않고 구경만 할 수 있을까. 주거니 받거니… 알코올 도수 5도에 불과한 맥주였지만 빈속에 마시니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반갑습니다. 시간이 제법 늦었어요. 약속대로 제가 먼저 소나기목욕을 할까요?”
두어 시간 전에… 도대체 무슨 약속을 한 것일까? 어떻게 했기에 그녀가 스스럼없이 곁에 누워 있다가 불현듯 먼저 샤워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권도일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기억을 곰곰 되살렸다. 그러나 머릿속엔 지푸라기로 그득 찬 느낌일 뿐, 한 번 끊어진 필름은 결코 되살릴 수 없었다.
“여기 북한 아가씨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개방적으로 변했지요?”
그는 쑥스러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억지로 북한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담배 피우는 일 외에는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세상에… 바라보기만 해도 어여쁜 여자가 눈앞에서 샤워를 하고, 심장은 팔딱팔딱 뛰는데 이곳이 북한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면… 덜컥 겁이 나곤 했으니, 에라! 담배라도 피워야지.
“조선도 이제 천지개벽을 하고 있어요. 젊은 남녀가 서로 좋아 연애하는 것을 나서서 칭찬은 하지 않지만… 뒤에서 손가락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요? 정말 천지개벽을 했군요.”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샤워기에서 뿜어내는 물줄기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고, 북한산 권련이 타들어가면서 퍼져 나오는 도라지 향은 코끝에 아련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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