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환 헤럴드경제 G밸리 논설위원
▲노재환 헤럴드경제 G밸리 논설위원

[헤럴드경제 = G밸리 노재환 논설위원 기자]우리는 간혹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사주(四柱)를 본 뒤 한해 운세나 합격의 유무, 사업의 길흉, 좋은 날짜나 방향, 업종 등을 문의하곤 한다. 앞서, 그 답의 결과를 떠나 도대체 사주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는 걸까?명리학(命理學)에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그 모태의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고 자라다가 출산을 통해 우주에 나오는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태어난 생년, 생월, 생일, 생시로 네 기둥인 사주가 형성되고 한 기둥 마다 음양오행에서 분류되어진 천간, 지지라는 문자에서 각각 한 글자씩 모두 여덟 글자가 되어 팔자가 된다. 이는 단순한 글자 해석이다. 우리에게는 그 속을 들여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 에너지는 뭉치고 흩어지며 에너지는 순환하기 마련이다. 동양 사상에서는 이를 두고 영적 진화를 위해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현재의 삶을 살고 있으며 이 현재의 삶은 과거의 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명리학에서의 사주팔자는 내 인생에 있어 계획표이며, 살아갈 각본이며, 설계도다. 그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자기암시를 통해 긍정성과 적극성의 자양분으로 키워야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명리학에서는 천명이라 하여 인간의 명은 하늘로부터 받게 된다. 일체의 일이 미리 결정되어 피할 수 없는 것이 명이며, 시간과 만날 때 결정되는 운은 명이 처한 환경과 활동 상태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인 것이다. 사주와 운은 불가분의 관계로 운과 사주 이 둘이 합해서 운명이라고 한다. 동양 사상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이타적으로 긍정과 부정의 시각으로 작용해 왔다. 특히 명리학은 학문으로서의 그 역사를 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활의 전반에 걸쳐 음양오행원리에 따르는 삶을 살고 일체의 제도나 기물 등도 그 이치에 맞게 만들어 사용해 왔다. 음양오행은 우주의 질서이며 법칙이다. 소우주인 인간을 위해 음양오행을 실용적으로 적용한 학문이 바로 명리학이며, 한의학이고, 풍수지리학이다. 명리학은 인간에게 적용시킨 것이고, 한의학은 인을, 풍수학은 지를 적용시킨 학문이다. 한의학의 경우, 70년대 초반부터 한의학과를 통해 인정받았다. 풍수학지리학 또한 서울대학교에서의 활약 등으로 자연과학의 일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리학의 경우, 대학원에서의 석사과정 등으로 개설되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제도권 밖의 학문으로 분류된 상태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쯤에서 떠오른 의문, 그 이유는 뭘까?사실 오행(五行)과 천간지지를 기본으로 하는 명리학은 괘(卦)를 이용하는 점서(占書)인 주역(周易)의 역(易)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술(占術)과 혼동하여 명리학을 역술(易術)이라는 엉뚱한 명칭으로 불려지는 이유는 뭘까? 이는 일제 강점기 명리학의 학문적 명맥이 끊어지면서 나타난 이상 현상들이며 명리학과 명과학의 왜곡된 부분들이다. 역학의 한 분야인 명리학은 단순한 점술행위도, 인생의 심오(深奧)한 의미를 담고 있는 철학도, 주역의 점술행위인 역술도 아니다. 그 역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명리학의 위치는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던 제도권 안의 학문이었으며,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는 너무나도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역학의 원리를 기초로 한 오직 명리학과 명과학(命課學) 그 자체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명리학은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에 따른 의미처럼 죽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살아 숨 쉬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명리의 명(命)은 목숨 ‘명’자를 쓰며, 실존은 본질을 선행한다는 샤르트르의 말처럼 우리 인간의 실존 즉, 살아있는 것 자체가 중심이며 목적인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이 끝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우리는 현재의 몸으로 그것을 인식 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주에 의거하여 일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는 학문이 명리학이다. 명리학은 개인의 사주, 곧 생(生)년(年)월(月)일(日)시(時)를 분석해 나무(木)·불(火)·물(水)·쇠(金)·흙(土) 등 5가지 기운의 배합률을 알아낸 다음, 사람이 출생한 연월일시의 간지 여덟 글자에 나타난 음양과 오행의 배합을 보고, 그 사람의 부귀와 빈천·부모·형제·질병·직업·결혼·성공·길흉 등의 제반 사항을 판단하고 이를 다시 특정시간의 공간을 구성하는 5가지 기운의 배합률과 비교하는 학문이다. 자료부족으로 인해 명리학의 유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잔존하고 있는 문헌에 따르면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인 락녹자(珞錄子)와 귀곡자(鬼谷子)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역에 의한 음양의 학설이 먼저 존재했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비로소 태양계의 오행성(五行成)으로 운명(運命)을 판단하는 오행이란 학설이 유포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중국에서 연월일시의 간지를 이용해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26년 이후의 일이다. 이처럼 명리학이 역학의 여러 분야 중의 하나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 이후로 보인다. 당시까지만 해도 태어난 해인 ‘연주’를 위주로 사람의 운명을 분석하던 것을 이허중이 또다시 태어난 날인 ‘일주’를 위주로 하여 보는 법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후 당대 초에 원천강에 의해 본격적인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해, 송(宋)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허중(李虛中)·서자평(徐子平), 유기(劉基), 서대승(徐大升) 등으로 이어지는 140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구체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그렇다면 이쯤에서 명리학이 고대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파된 시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의 사주명리(四柱命理)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후인 조선조에 들어와서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태종 원년인 14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太宗)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韓氏)씨는 아들인 태종의 장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당시 문성윤(文成允)에게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경솔하게 점쟁이에게 물어보지 마소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 명리학이 전래된 시기는 늦어도 고려 말 12~13세기경으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명과학의 설치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세종 때인 1445년 연소자 10명을 뽑아 서운관에 소속시키고 훈도4~5명을 선출해 3일에 한 번씩 모여 습업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운관은 관상감의 전 기구이므로 그 이전에 이미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정직의 명과학훈도(命課學訓導)인 정9품인 2명을 두어, 운명·길흉 등에 관한 학문을 가르쳤다고 명시돼 있다. 합격자는 관상감(觀象監)의 관리로 배속되었으며, 1474년(성종5년) 일시적으로 폐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조 5백 년간 내내 과거시험에서 음양과(陰陽科) 또는 명과학(命課學) 제도가 시행됐다.제도상으로는 태조 원년인 1392년부터이지만 과거제도의 잡과에 음양과가 편성되면서부터 다. 초기에는 문신, 후기에는 기술관이 훈도(訓導)에 임명되었으며 과거제도의 음양과는 천문학, 지리학과 함께 명과학을 두어 각 분야별 인재를 등용하는 관문으로 기능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문신, 후기에는 기술관이 훈도에 임명되었으며 시험은 관상감에서 주관하여 별도로 훈도를 두고서 생도를 모집하고 명과학의 인재를 양성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이 시험을 치루거나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는 원천강(袁天綱) ·서자평(徐子平) ·응천가(應天歌) ·범위수(範圍數) ·극택통서(剋擇通書) ·삼진통재(三辰通載) ·대정수(大定數) ·육임(六任) ·오행정기(五行精記) ·자미수(紫微數) ·현여자평(玄輿子平) ·난대묘선(蘭臺妙選) ·성명총화(星命摠話)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으로 1차 시험인 초시(初試)와 2차 시험인 복시(覆試)로 나뉘어 3년마다 시행됐으며, 복시는 예조(禮曹)에서도 함께 주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명리학의 위치가 제도권 밖으로 왜곡되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조선 초기부터 과거제도의 명과학이라는 제도권내의 학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한민족 정체성 말살과 민족정기 억압의 강압통치로 인하여 대부분의 학문분야처럼 명리학과 명과학 또한 순식간에 지하로 숨어들면서 그 학문적 명맥이 단절되는 비운을 맞았다는 데 있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하나로 이용되었던 셈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귀신, 조선의 점복과 예언이라는 촌산지순(村山智順)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 민간에서 귀신에 대한 다양한 믿음과 점술이 행하여지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갖춘 명리학(命理學)·명과학(命課學) 보다는 오히려 이들 무속(巫俗)과 점술행위(占術行爲) 등으로 더욱 부추겼다. 일제가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하나로 이용된 셈이다. 조선조 5백년간 과거제도에서 음양과(陰陽科)의 명과학(命課學)으로 시행되어 제도권의 학문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당시의 지배학문인 주자학(朱子學)에 밀려 명리학(命理學)의 토대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가운데 맞이한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우리 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해 명리학과 명과학을 민간에서 행해지던 일개 점술행위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근대 서양의 문물이 우리사회 전반에 넓게 자리 하면서부터다. 18세기 들어와 서양은 산업혁명으로 동양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19세기 제국주위에 의해 서양은 우등의식, 동양은 열등의식을 갖게 되면서 동양은 서양을 무조건 숭배하기에 이른다. 서양의 분석적 시각이 동양의 조화적 시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동양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서양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결국 명리학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오늘의 현실에 이르게 된다. 자연의 이치, 우주의 원리, 나의 근원으로부터 시작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생극제화((生剋制化)로 이루어진 학문(學文)인 명리학(命理學). 사서삼경(四書三經), 그 어떤 책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사상적 깊이가 숨어있다. 동양의 사상에 중심축을 두고 있는 명리학은 스스로 무엇을 잘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있게 된다. 과한 것은 낮추고, 부족한 것은 보충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명리학의 가치가 미신취급을 받으며 제도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된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