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맞는 말이다. 아버지, 할아버지는 선택이 아니고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니까. 그렇다고 마냥 자유로울 순 없다. 원죄가 있고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정말 잔인한 역사가 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다. 그 세월동안 누군가는 울분을 토하며 목숨을 버렸고 어떤 이는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만주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했고 아무것도 몰랐던 수많은 민초들은 한뼘도 안되는 땅까지 빼앗기고 만주, 연해주, 중국, 일본 등지를 떠돌았다.
그러나 몇몇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들었다. ‘보호조약’이 아님을 알면서도 서명했고 일본이 내민 강제병합을 앞장서서 받아들이고 총독부에 빌붙어서 거들먹거리며 동족을 갉아먹었으며 ‘황국신민’이 되고자 기꺼이 펜을 들고 이름을 바꾸었다.
정의와 매국의 두 길. 광복된 조국에서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당연히 역전되어야 했지만 길은 바뀌지 않았다. 왜놈순사는 대한민국 경찰이 되었고 자원해서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었던 일본군 장교는 한국군에서 별을 달았다. 판사는 여전히 판사였으며 매국의 공로로 토지와 하사금을 받았던 부자들도 엄청난 부를 고스란히 지켰다.
수년, 수십년 만에 돌아온 만주의 별들과 민초들은 내 한 몸 제대로 눕힐 공간도 없는 굴러온 돌이 되었다. 그저 나라 찾은 기쁨만 가득할 뿐이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나라의 죄다.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나라다. 친일반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반역으로 이룬 재산을 몰수하지 못한 나라의 무한 책임이다.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프랑스는 해방과 함께 정통성을 이어받은 드골 임시정부가 최우선적으로 나치 독일 협력자들을 찾아내 수천명을 사형 등 엄벌에 처했다. 이방인의 작가 카뮈도 ‘반역과 불의의 인간들을 즉시 처벌하지 않으면 어제의 불행이 또 이어진다’며 지식인들의 처벌에 앞장섰다.
대한민국이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제정, 친일청산에 나선 때는 광복 3년후였다. 그 사이 친일세력들은 미군정의 등에 업혀 곳곳에 파고들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겐 친일청산보다 반공과 안정이 먼저였다. 처벌받아야 하는 친일매국노들이 행정, 군사, 치안 경험자로 우대받으며 처벌하는 쪽에 섰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더욱이 ‘칼 찬 일제 순사’ 출신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빨갱이라고 우기며 공격, 반민특위는 제대로 칼도 뽑지 못하고 1년여만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친일세력들은 지금까지 만수무강하며 더러 ‘일제때가 좋았다’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친일파 증조부를 둔 한 여배우가 ‘4대째 의사 집안’이라고 자랑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최근 우리 역사에서 4대 100년동안 잘살았다면 친일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번 넉넉하게 채운 곳간은 쉽게 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추측할 수 있는 일이건만…
세월이 많이 지났다. 이제 사람에 대한 단죄는 만만찮다. 하지만 누가 일제에 충성했는지는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렵긴 하지만 그들 친일파들의 재산환수는 아직도 기회가 있다. 오는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된다.
‘불의는 망하고 정의는 흥한다’는 사실이 신화나 전설이 아니고 현실이 되어야 한다.
이영만 전 대표이사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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