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속도조절론 부상…안전·통제 논의 확산

미·중 경쟁 속 자율규제 현실화는 쉽지 않아

학습 둔화해도 AI 인프라 투자 위축은 제한적

투자 초점 ‘누가 만드나’서 ‘누가 돈 버나’로

일론 머스크(왼쪽부터) 스페이스XAI 최고경영자(CEO),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 샘 울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등은 AI 개발 속도조절과 안전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규제틀을 정하는데 적극 목소리를 내고 있다. [AFP]
일론 머스크(왼쪽부터) 스페이스XAI 최고경영자(CEO),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 샘 울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등은 AI 개발 속도조절과 안전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규제틀을 정하는데 적극 목소리를 내고 있다. [AFP]

[황보원경 메리츠증권 상무/정리=홍태화 기자] 최근 글로벌 인공지능(AI) 업계에서 이른바 ‘AI 속도조절론’이 부상하면서 AI 관련 주식의 변동성이 한 차례 확대됐다. 앤트로픽과 오픈AI 등 프런티어 AI 기업의 경영진이 잇따라 AI 개발 속도를 조절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다.

여기서 말하는 속도조절은 AI 기술의 발전을 아예 중단하자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모델의 능력이 인간의 관리·감독 능력을 넘어서는 속도로 발전하지 않도록 충분한 안전성 검증과 외부 평가를 거치고, 필요하면 차세대 모델의 학습이나 배포 시점을 늦추자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AI가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도구를 사용하고, 코드를 작성하며, 다른 시스템에 접근하는 ‘자율 에이전트’로 진화하면서 통제 가능한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가 실제 AI 산업의 투자 사이클을 늦출 정도의 규제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필자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한다.

경쟁은 스스로 멈출 수 없다

첫째, 속도조절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주요 시장 참여자들이 동시에 참여해야 한다. 한 기업만 개발 속도를 늦추는 동안 경쟁 기업이 더 큰 모델을 내놓고 시장을 선점한다면 자율규제에 참여할 경제적 유인은 급격히 떨어진다. 결국 실효성 있는 속도조절에는 기업 간 강한 공감대뿐 아니라 검증 가능한 공동 기준과 정부 차원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미국의 정책 방향은 광범위한 AI 개발 제한보다는 혁신 가속과 인프라 확대, 미국의 AI 주도권 확보에 무게가 실려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AI 정책 역시 ‘혁신 가속’과 ‘AI 인프라 구축’을 주요 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 기업들의 자발적 합의만으로 경쟁적인 AI 개발 사이클을 크게 늦추기는 쉽지 않다.

둘째는 중국과의 경쟁이다. 미국 기업들만 개발 속도를 늦출 경우 중국 AI 기업들에 추격의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중국 정부는 올해도 컴퓨팅 인프라와 AI 응용 확대뿐 아니라 오픈소스 생태계 육성을 정책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AI가 단순한 신산업을 넘어 국가안보와 산업 패권의 문제로 연결된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속도를 낮추기는 쉽지 않은 구조다.

셋째, 설령 자율 규제에 합의하더라도 이미 진행 중인 경쟁적 투자 사이클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전례가 드문 고성장이 이어지는 산업에서 경쟁자들이 서로 약속하고 투자를 줄인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달리는 기차에서 누구도 먼저 뛰어내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런티어 모델의 개발 속도가 일부 조정된다고 해도 이미 진행 중인 AI 인프라 투자 사이클이 즉각 꺾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그래픽처리장치(GPU),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메모리와 네트워크 장비 투자는 수년에 걸쳐 집행된다.

더욱이 AI 산업의 무게중심은 모델을 계속 크게 만드는 ‘학습’에서 실제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추론’으로 점차 넓어지고 있다. 따라서 학습에 투입되는 컴퓨팅 자원이 일부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그 자원이 추론 서비스, AI 에이전트, 보안과 모델 검증 등으로 이동한다면 전체 컴퓨팅 수요가 같은 폭으로 감소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AI 속도조절론이 AI 인프라 투자 축소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다.

지금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

선두 기업들은 왜 지금 이런 목소리를 냈을까. 필자는 기업공개(IPO) 일정에 주목한다. 앤트로픽은 곧 나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다. 대규모 상장을 목전에 둔 기업이 갑자기 속도조절을 들고나온 데에는, 막대한 학습용 AI 서버 비용을 줄이고 그 연산 자원을 추론 서비스의 외부 판매로 돌려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계산이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학습에 들어가던 기회비용이 매출로 전환되면 상장을 앞두고 영업이익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상장을 내년으로 미룬 오픈AI 역시 재무 개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셈법을 공유한다. 안전이라는 명분 뒤에 비용 부담이라는 현실적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시장에서 공감을 얻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 논의를 AI 인프라 투자의 종료 신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AI 투자시장은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장의 관심이 “누가 더 큰 모델을 만들 것인가”와 “누가 더 많은 GPU와 HBM을 공급할 것인가”에 집중됐다면, 앞으로는 “AI를 활용해 실제로 누가 돈을 벌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욱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기업은 막대한 모델 개발비를 직접 부담하지 않으면서 AI를 기존 사업에 접목해 매출과 마진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플랫폼 사업자들이다.

클라우드 빅테크가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AI 모델 개발비를 부담하는 동안, 콘텐츠·광고·커머스·소프트웨어 기업은 AI를 이용해 콘텐츠 생산비용을 낮추고 고객 체류시간과 이용 빈도를 높일 수 있다. AI 도입이 실제 이익 증가로 연결되는지를 시장이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증시로 눈을 돌린다면

아쉽게도 국내에는 아직 이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놓는 기업이 많지 않다. 소프트웨어, 이번 논의로 주목받은 보안, 대표 인터넷 플랫폼 기업 가운데 AI를 실적으로 증명한 곳은 드물다. 그래서 미국 대표 플랫폼 기업들의 성과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국내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 아이디어를 찾아보고자 한다.

대표적인 분야가 스마트글라스다. 스마트폰 이후 새로운 AI 인터페이스를 찾고 있는 글로벌 빅테크들은 안경이라는 폼팩터에 상당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메타는 이미 AI 글라스 이용자가 수백만 명 수준으로 늘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올해도 새로운 AI 글라스 제품군을 확대했다. 향후 디스플레이가 탑재된 증강현실(AR) 글라스 출시가 본격화되면 초소형·저전력 디스플레이 관련 부품 시장도 함께 열릴 가능성이 있다.

AI 속도조절론 속 주목할 만한 기업
AI 속도조절론 속 주목할 만한 기업

국내에서는 사피엔반도체를 눈여겨볼 수 있다. 사피엔반도체는 AR 스마트글라스에 적용되는 실리콘 기반 발광다이오드(LEDoS·LED on Silicon)용 상보성 금속산화막 반도체(CMOS) 백플레인(Backplane) 기술을 보유한 팹리스(Fabless) 기업이다.

LEDoS는 초소형 마이크로 발광다이오드(Micro LED)를 실리콘 기반 회로 위에서 구동하는 기술로, 높은 밝기와 낮은 소비전력이 필요한 AR 글라스에 적합하다. 회사는 올해 캘리포니아 소재 빅테크 기업과 AR 스마트글라스용 LEDoS 백플레인 웨이퍼(Wafer)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팹리스 기업 특성상 시장 초기에는 고객사와 공동개발을 진행하면서 개발 매출의 비중이 높지만, 제품이 실제 양산 단계로 넘어가면 매출 증가에 비해 고정비 증가가 상대적으로 제한돼 영업레버리지가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스마트글라스 시장의 관전 포인트 역시 단순한 시제품 공개가 아니라 글로벌 고객사들의 제품이 언제 본격적인 양산 단계로 진입하느냐에 있다.

AI 서버에서는 차세대 메모리 모듈 규격인 소캠(SOCAMM)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엔비디아(NVIDIA)는 차세대 베라(Vera) 중앙처리장치(CPU)에 저전력 더블데이터레이트 메모리(LPDDR5X)와 SOCAMM을 결합한다.

기존 서버용 메모리와 달리 저전력 LPDDR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모듈을 탈부착할 수 있어 서버 환경에서 유지보수와 용량 확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엔비디아는 이를 통해 기존 5세대 더블데이터레이트 메모리(DDR5) 대비 메모리 대역폭과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국내 기판업체 심텍(Simmtech)은 SOCAMM용 인쇄회로기판(PCB)을 차세대 AI 서버용 제품군으로 공급하고 있다. 회사 역시 SOCAMM을 AI 데이터센터용 차세대 메모리 모듈 PCB로 명시하고 있으며, 최근 관련 생산능력(Capacity) 확대도 진행하고 있다. AI 서버의 경쟁이 단순히 GPU 성능에서 전력·공간·메모리 효율까지 확대될수록 SOCAMM과 같은 새로운 폼팩터를 지원하는 기판산업의 중요성도 커질 수 있다.

결국 AI 속도조절론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AI 투자가 끝난다’는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AI 산업이 무조건적인 모델 성능 경쟁에서 안전성, 비용 효율, 상용화와 수익성을 동시에 따지는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국내 메모리 기업 입장에서도 어느 하나의 AI 모델이 최종 승자가 되느냐보다 글로벌 AI 투자와 추론 수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AI 인프라 투자가 이어지고 메모리 공급 부족이 장기화한다면 모델 간 경쟁 자체가 메모리 수요로 이어지는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동시에 시장의 다음 질문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AI를 누가 가장 잘 만드느냐”를 넘어 “AI로 누가 실제 돈을 버느냐”다. 하드웨어의 고속 성장 이후 플랫폼과 서비스, 그리고 새로운 AI 디바이스가 실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면 AI 투자 사이클의 다음 주도주는 그 답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기업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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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5@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