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유동성 전쟁]
개인 예금 감소에도 방파제 역할 했던 기업예금
연말 만기 도래·설비투자 겹쳐 ‘대규모 이탈’ 가능성
은행 유동성 지표 LCR도 악화
리스크 지우려 예금 특판·은행채 발행 러시
금융당국, 은행권에 채권 발행 시기 분산 요청
[헤럴드경제=서상혁·박혜림 기자] 올 상반기 주식시장 머니무브에도 ‘유동성 버팀목’이 됐던 기업예금이 4분기 들어 흔들리고 있다. 한해 동안 60조원 가까이 늘었던 기업 정기예금이 연말 만기 도래 등으로 감소 전환한 것인데, 대규모 신규 설비 투자 등 메가톤급 변수도 남아 있어 시간이 갈수록 이탈 자금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간 기업예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은행으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 됐다. 언제 대규모 자금이 빠질지 모르는 만큼, 연 4%의 고금리 정기예금 특판을 물론이고 예정에 없던 은행채까지 추가로 찍어내는 모습이다.
문제는 은행권의 수신 경쟁이 과열될수록 저축은행 등 2금융권의 자금 조달 부담도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높이고 은행채 발행을 늘리면 조달비용이 상승하고, 이는 대출금리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당국도 은행채 발행 시점 분산을 요청하는 등 리스크 관리에 나섰다.
머니무브 구세주 됐던 기업 예금…개인 예금 3조 빠질 동안 13조원 늘어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국내 5대 은행의 지난 13일 기준 기업 정기예금 잔액은 560조5991억원으로 집계됐다. 전월말 561조2113억원 대비 6122억원 감소했다.
기업예금은 올해 머니무브 국면에서도 꾸준히 증가하며 은행들의 버팀목이 됐다. 코스피 지수가 8000 중반대까지 올랐던 6월말만 하더라도 기업을 제외한 개인 등의 정기예금 잔액은 435조9135억원으로 지난 연말 438조8769억원 대비 2조9634억원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기업 정기예금 잔액은 13조769억원 늘었다. 주식시장 불장으로 개인 자금 이탈이 이어졌음에도 은행권이 “유동성 흐름에는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던 배경이다.
하지만 이달 들어 기업의 정기예금 만기가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이탈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월 말부터 지난 13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에 기업예금이 8조4000억원 감소한 은행도 있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이탈은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개인 정기예금은 만기가 돌아와도 재예치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기업은 설비투자 등 갑작스러운 자금 수요가 생기면 예금을 재예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연말에는 각종 대금 결제 수요도 예정돼 있어 기업예금을 마냥 안정적인 자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 산업계 관계자도 “대규모 예금 인출은 공장 증설처럼 거액의 현금이 필요한 투자 계획이 실행될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은행 유동성 지표도 악화…4대 은행 LCR 하락 전환
버팀목이 됐던 기업 예금 이탈이 본격화하면서 은행권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연말 각종 유동성 규제를 맞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의 생산적 금융 등 각종 대출 수요를 맞추려면 유동성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같은 리스크는 은행권의 유동성 지표인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에서도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4대(KB·신한·하나·우리) 은행의 통합 LCR 평균치는 1분기말 106.08%에서 2분기말 106.14%로 오른 후 3분기(잠정치)말 104.76%로 하락했다.
LCR이란 금융회사가 단기적인 유동성 충격에 대응할 수 있는 고유동성자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고유동성 자산을 30일간 순현금유출액으로 나눈 비율로 금융당국 규제 기준은 100%다. 순현금유출액이 늘어날수록 LCR은 하락하는 구조다.
바젤Ⅲ 기준에 따르면 기업예금은 법인 유형이나 예금의 성격에 따라 개인예금보다 최대 10배 높은 현금유출률을 적용받는다. 같은 정기예금이라도 개인예금보다 기업예금의 현금유출액이 더 크게 산정돼, 결과적으로 LCR 하락 압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전체 정기예금 중 기업의 비중은 지난 연말 53.2%에서 10월 13일 55.3%로 상승했다. 그러잖아도 기업 예금은 개인 예금 대비 LCR 산정 시 불리한데 그마저도 빠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개인 고객은 한 번 은행에 돈을 맡기면 그대로 두는 경향이 있지만 기업은 예측할 수 없다”며 “LCR 계산 시에도 개인 예금 대비 유출률이 높게 보는 이유인데, 질적으로 좋지 않은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은행들이 은행채를 적극 발행하는 것도 국공채 등 고유동성 자산을 확보해 유동성 비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머니무브 청구서 받아 든 은행권, 채권 발행도 ‘웃돈’…대출 차주엔 ‘나비효과’
최근 들어 은행권이 연 4%의 고금리 특판 정기예금을 내놓는 등 수신 경쟁에 나서는것도 이같은 ‘기업 예금’ 리스크 때문이다. 은행권에선 머니무브 청구서를 받아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은행채 발행도 늘리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올 4분기에 걸쳐 6조원의 은행채를 추가로 발행하겠다고 공시했다. 국민은행은 올해 11조원을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당초 한도를 모두 소진한 후 추가 발행에 나선 것이다.
나머지 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중 아직까지 올해 추가 발행 계획을 공시한 곳은 없지만, 모두 전년 대비 올해 은행채 발행량을 늘린 상황이다. 금융투자협회 채권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4대 은행의 올해 누적 발행액은 47조4300억원으로 전년도 발행액 45조3000억원을 넘겼다. 은행권 전체 기준으로는 226조3580억원으로 역시 전년도 전체 발행액(221조6100억원)을 초과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4분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은행채가 전년 대비 늘어난 데다, 금리가 더 오르기 전에 발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연말에 접어들수록 은행채 발행에 값비싼 대가를 치를 전망이다. 연말을 앞두고 은행채 발행이 늘어나는 가운데 발행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투자자를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주요 시장 참여자들이 한 해 거래를 정리하는 ‘북클로징’까지 예정돼 있어 수급 여건에 따라 금리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문제는 이같은 비용이 2금융권으로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축은행의 경우 사업 재원 상당 부분을 예금을 통해 충당한다는 점에서, 은행보다 예금 금리를 높게 유지해야 한다. 은행이 정기예금 금리를 높일수록 저축은행도 따라 올려야 한다는 의미다. 카드사와 캐피탈 등 여신전문금융회사도 마찬가지다. 은행채 발행량이 많을수록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떨어지는 여전사는 금리를 더 올려 발행해야 한다.
대출 차주로도 그 비용이 전가되고 있다. 은행권 고정형 대출은 은행채를 준거금리로 삼는데, 채권 발행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금리가 오르는 구조다. 변동형 대출의 준거금리인 신규코픽스 역시 예금과 은행채를 통한 조달비용이 커질수록 높아진다. 지난 16일 기준 은행권의 고정형 대출 금리 상단은 연 7.02%, 변동형은 연 6.74%로 연내 8% 가능성도 제기된다. 2금융권 역시 높아진 자금조달 비용을 대출금리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아직 레고랜드급은 아니지만…금융당국, 은행권에 수신 경쟁 자제 요청
금융당국도 연말 은행권의 수신 경쟁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국고채 발행 축소 등으로 은행채와 여전채 금리 간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기업예금의 변동성이라는 구조적 리스크가 남아 있어 시장 상황을 안심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당국은 이달 초 은행들로부터 은행채 발행 계획을 제출받고 발행 시점을 분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레고랜드 사태 때처럼 은행채 발행 자제령과 같은 특단의 조치를 내릴 상황은 아니지만, 시장 상황을 살피면서 은행들에 지속적으로 리스크 관리를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hy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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