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칭기즈칸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2000년 전 흉노의 유물들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신화 속 동물과 천체가 섬세하게 새겨진 황금 관식과 은제 말 장식에는 유라시아 초원을 가로지른 제국의 숨결이 서려 있었다. 그 문명적 위용 앞에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밀려왔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가 과연 전부일까.
문득 역사의 미답지를 파고들고 있는 두 사람이 떠올랐다. 퇴직 후 한민족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가 아닌 중앙아시아였다는 근거를 찾는 대기업 사장 출신의 선배, 그리고 환인·환웅·단군을 신화 속 인물이 아닌 고대 통치 체계의 직책으로 해석하며 상고사(上古史)를 추적하는 벤처 기업인이다. 물론 두 사람의 주장은 학계의 통설과는 거리가 먼,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그러나 이들은 흩어진 사료를 모아 자신들의 질문을 검증하려 애써왔다. 최근 그 고독한 탐구에 뜻밖의 조력자가 가세했다.
‘AI 에이전트’다. 중국과 러시아, 미국, 유럽에 흩어진 고문헌과 비문을 탐색하고 대조해 사라진 지명의 단서를 찾고 사료 사이의 연결고리를 추적한다. 물론 AI가 제시한 단서가 곧 역사적 진실은 아니다. AI가 만들어낸 허위 정보와 잘못된 추론을 걸러내는 고증과 반증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가설이 옳은가와 별개로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다. 거대 연구기관과 전문가의 영역이던 자료 탐색의 역량이 개인의 서재로 옮겨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적 확장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화산 폭발의 열기에 숯덩이처럼 까맣게 변해 2000년간 펼쳐볼 수 없었던 고대 로마의 파피루스는, 젊은 학생들이 AI로 그 일부를 읽어냈다. 올해 4월에는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23세 청년이 AI의 도움으로 수학자 에르되시가 남긴 약 60년 묵은 난제에 대해 새 해법을 찾아냈다.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질문들이 AI와 손잡은 개인의 손끝에서 베일을 벗고 있다.
인류사의 권력 지도는 끊임없이 이동해 왔다. 고대에는 노동력이, 산업화 시대에는 자원과 자본이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디지털 혁명 시대에는 정보를 장악한 플랫폼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렇다면 AI 시대 권력의 원천은 어디로 옮겨질까. 그 답은 다시 ‘지식’이라고 본다. 단,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식을 연결하고 해석해 새로운 판단과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AI가 보편화할수록 무엇을 묻고 어떻게 지식을 연결하며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는지에 따라 지적 깊이의 격차는 오히려 커질 것이다. 이것이 AI 시대의 ‘지적 리더십(Intellectual Leadership)’이다. 철학과 역사를 넘나드는 인문적 깊이, 통념을 의심하고 증거를 따지는 비판적 사유, 기계가 제시한 결과를 인간의 가치에 비춰 판단하고 그 판단이 초래할 사회적 결과까지 책임지는 결단이 그 핵심이다.
AI는 인류에게 가장 정교한 지적 메스를 쥐여주었다. 그러나 메스는 도구일 뿐, 집도는 인간의 몫이다. 역사상 주요 권력 전환기에는 새로운 도구를 먼저 손에 쥔 자가 아니라 그 도구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자가 시대를 이끌었다. AI 시대도 다르지 않다. 지적 권력은 AI 에이전트를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인류가 아직 묻지 못한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 답에 책임지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영 제4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
gre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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