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도예 기자] 올 한해 사법부는 법조비리 등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 그 와중에도 노동자와 시민 인권의 보루가 될 판결도 세상에 나왔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무죄판결부터 청와대 100m 앞 시민의 집회시위 권리를 보장하는 행정법원 판결까지 면면도 다양했다. <헤럴드경제>는 법조계·학계 주요 인사와 함께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판결을 꼽았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항소심 첫 ‘무죄’ = 지난 10월 광주지법 형사3부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입영을 거부한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병역법위반 혐의 ‘무죄’를 선고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은 있었지만, 항소심에서 무죄가 내려진 건 처음이었다. 재판부는 “국가안보와 관련있다고 해 소수자의 논리를 외면하고, 대체복무를 마련하지 않은 채 입영거부에 대한 책임을 이들에게 돌려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정연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은 이 판결을 올해의 판결로 꼽으며 “한국사회가 느리지만 조금씩이나마 전향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판결”이라고 했다. ▶촛불 길 터준 행정법원 판결= 행정법원은 지난 2일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해 촛불집회를 열 수 있다고 결정했다. 가처분 결정이기는 하지만, 청와대 100m 지점까지 집회와 행진이 허용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재판부는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는 집회의 시간,장소,방법과 목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내용으로 한다”며 “집회 시위가 전면으로 제한되는 것 자체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있다”며 이처럼 결정했다. 다만 오후 1시에서 5시 30분까지 시간 제한을 두고 행진을 허용했다. 김한규 서울변회 회장은 “청와대 바로 앞까지 시민들이 행진할 수 있게 해 집회의 자유를 진일보시킨 결정”이라고 봤다.

▶삼성반도체 근로자 난소암 첫 산재 인정= 지난 1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난소암으로 숨진 노동자가 업무상재해를 인정받았다. 반도체 노동자의 난소암 발병에 대해 업무상재해를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부장 박연욱)는 “난소암이 발병한 원인이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작업장에서 근무하며 유해화학물질에 장기간 노출되고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며 피로,스트레스가 누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판결 이후 삼성전자의 직업병 피해 보상에 변화가 있을지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간 삼성전자는 근로자들의 난소암 발병과 업무의 관련성이 낮다고 보고 치료비 수준만 지급하는 ‘3군’ 보상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법원이 난소암 발병을 산재로 인정하며 보상대상의 확대가 불가피해졌다. 김한규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반도체 관련 사건에서 희귀하게 발생한 난소암을 산재로 인정한 첫 판결”이라고 했다.

▶국회선진화법 각하···‘합의의 정치’ 강조한 헌재=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국회선진화법’이 법안심의·표결 권한을 침해한다며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을 상대로 낸 권한쟁의심판을 각하했다. 2012년 5월 여야합의로 제정된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각 교섭단체와 합의한 경우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법안을 본회의에 부의하려면 재적의원 5분의 3이상 찬성이 있어야 한다.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이 ‘식물국회’의 원인이라며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요청했다. 헌재는 이 권한쟁의 심판의 피청구인은 국회가 돼야 한다며 청구가 적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또 “입법교착은 국회 운영의 관행 내지 여야 정치력의 부재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며 “만일 제도적 미비가 영향을 미쳤다면 제도 개선으로 스스로 바로잡아야지, 국회 다수파 의원들이 권한쟁의 심판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장영수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안의 중대성, 논거의 파급력을 고려할 때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고 본다”며 이 결정을 선정했다.

▶‘사시 폐지’ 합헌···법조계 파장 = 백원기 대한법학교수회 회장(인천대 교수)는 ‘사법시험 폐지’ 법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을 선정했다. 지난 9월 헌법재판소는 “사시 폐지가 고시생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며 사시 폐지를 규정한 변호사시험법 부칙에 대해 재판관 5대 4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의 합헌 결정에 따라 사법시험은 예정대로 오는 2017년 12월 31일 폐지된다. 그러나 판결 이후에도 사시존폐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판결 직후 사시존치 활동을 해온 대한변호사협회 하창우 협회장은 “사시존치 법안을 국회에서 새롭게 입법하는 것은 헌재 판결에 배치되지 않는다”며 사시존치 운동을 계속할 것을 시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