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풍요→빈곤 →고통 →도전의 역정…인문학적 철학 바탕 냉철한 승부사로 떠오른 ‘벤처 1세대’ 김태섭 바른전자 회장
김태섭 바른전자 회장(53)은 ‘반도체적 인간’이다. 타인의 심리와 관계의 철학, 그리고 무위사상에 천착하는 학자적 면모를 보이다가도 ‘사업적 결단’의 때가 다가오면 냉철한 승부사로 변모한다. 고요하던 부도체에 격렬한 전기가 흐르는, 도체화의 순간이다. 그래서 그가 국내 메모리 반도체 분야 강자인 바른전자의 수장이 된 건 어찌 보면 ‘운명’이다.
도체적 승부사 기질로 ‘벤처 1세대’의 성공신화와 바른전자의 성장 1기를 만들어 온 김 회장은 이제 부도체적 경영인으로서 바른전자의 영속화를 꿈꾼다. 역시 핵심은 시장의 변화에 따라 기민하게 성질을 바꾸는 반도체적 DNA다.
요식 알바·DJ·막노동…보리차사업 성공 ▶생존에서 사람과 도전을 배우다=김 회장이 사람을 향한 관심과 도전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배우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겪은 가세 악화의 영향이 컸다. 서슬 퍼렇던 1960년대, 중앙정보부 충청지부장을 지낸 아버지 덕에 부족한 것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등하교 길에는 늘 기사 딸린 승용차가 함께했고, 공부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어서 그랬다는 걸 모르고…참 자기중심적이었죠. 타인을 평등하게 보지 못하고, 내 위에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풍족한 환경은 계속될 것 같았다. 삶의 바닥은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이 초등학교 4학생이 되던 해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화초 같던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 앉아 물건을 팔았다. 저택이 전세집이 되고, 전세집은 월세집으로 변했다. 봉천동 달동네의 가파른 언덕길은 달라진 처지를 절로 절감하게 했다. 갑자기 사람이 보였다. “이른바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이더군요. 처음에는 그저 자신감 없어져 입을 닫았습니다. 당시 타인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는데 그 속에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겸손과 배려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여러 사람의 협조와 협력을 통해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어린나이에 깨닫게 됐죠”.
몰락의 고통을 자성의 도구로 삼고 나자 도전이 보였다. 가족의 삶을 책임지려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그에게 ‘사치’ 같았다.
“프로필에는 제가 경문고를 졸업했다고 돼 있는데, 사실 아닙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죠. 육성회비조차 못 내는데 어머니께 부담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서울에 처음 생기기 시작한 롯데리아에서 시급 4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했다. 용산의 한 음악다방에서 DJ로도, 건설현장의 막일꾼으로도 활동했다. 자본금이 생기자 ‘사람들이 매일 먹는 보리차를 예쁘게 포장해 정기적으로 방문판매를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포에서 가마니로 공수해 소분한 보리차는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사업 성공에 대한 가능성이, 제품에 가치를 더하는 경영기법이 눈에 보였다.
실패는 회사의 최고 자원…복지부동 불용 ▶도체적 승부사 기질로 성공신화를 일구다=이후 독학으로 검정고시와 대입시험(한양대 경영정보학)을 치러낸 김 회장은 군 제대 6개월 만인 1988년 10월 바른전자의 모체와도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창업한다.
컴퓨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 정보와 첨단기기의 가치가 급상승할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데이터베이스는 일종의 PC 제조사였죠. 메모리 카드, 슬롯 등을 사다가 완제품을 조립하는. 그런데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회사의 데이터 전산화를 함께 컨설팅하고 대행도 했죠”. 보리차에 아이디어를 더해 사업아이템으로 승화시켰듯, 다시 한 번 하드웨어에 콘텐츠를 결합한 셈이다.
결국 시스템 및 네트워크 통합 사업까지 병행하게 된 데이터베이스는 창업 첫해 400만원이던 매출이 이듬해 2억원으로 50배 성장할 정도로 승승장구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매출 300억원대의 강소기업 반열에 오른다. 추가로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는 국내 통신장비 1세대 기업으로 덩치가 데이터베이스의 두 배에 이르던 케이디씨정보통신(現 바른테크놀로지) 인수제안(2003년)도 받았다.
매출 300억원짜리 회사가 600억원대의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승부사의 기질로 합병을 강행했다. 이후 2010년 윤석원 전(前) 대표로부터 매출 1000억원대의 바른전자를 인수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장한계에 직면한 회사를 당신이라면 더 키워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람의 신뢰에 김 회장은 늘 ‘도전’으로 답했다.
매출 2400억원대의 중견기업이 된 바른전자의 경영 이념은 ‘창조적 혁신과 도전’이다. “실패는 회사의 가장 큰 자원이다. 복지부동하고 사고를 치지 않으려 하는 임원은 우리 회사에 있을 수 없다”는 게 김 회장의 신념이다. 매출의 70%가 특정 거래처에서 나오는 기형적 수익구조를 바꾸기 위해 인수 즉시 500억원의 자금을 투입, 생산능력을 세배 이상 키운 결단도 이런 ‘도체적 성정’에서 나왔다. 급격히 늘어난 재고를 대대적인 영업확대로 다양한 기업에 납품한 결과, 현재 특정 거래처의 매출비중은 20%로 낮아졌다. ‘새우가 고래를 먹는 것도 두려워 않는’ 개척자 정신이 바른전자의 오늘을 만든 셈이다.
전문성 부족분야 과감히 포기…성장가도
▶부도체적 분석과 철학으로 바른전자의 내일을 그리다=다만, 바른전자의 더 큰 내일을 그리는 김 회장에게 도전은 ‘문어발식 확장’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가 최근 구성원들에게 강조하는 경영철학은 바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무위사상이다. “도덕경을 보면 굉장히 많은 ‘버림’의 사례가 나와요.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 더욱 많다는 것이 인생의 진리거든요.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빼고 줄이다 보면 진정한 목표가, 진짜 중요한 것들이 남는거죠”. 자기만의 ‘전문분야’를 만들지 않고, 덩치가 커질수록 모든 것을 다 하려 하는 국내 대기업의 생리가 애플같은 성공신화 달성을 막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김 회장은 바른전자를 ‘한 우물에 집중해 끝내는 단물을 보고야 마는’, 전문성을 갖춘 기업으로 변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김 회장이 연세대 정보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한 데 이어, 최근 서강대 인문대학원에서 종교심리학을 전공 중인 것도 같은 이유다. “경영은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인데, 회사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조직이 비대해집니다. 그 조직의 성격과 생각을 어떻게 파악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느냐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재 바른전자와 바른테크놀로지 두 개의 계열사로 이뤄진 회사의 시너지를 이끌어내는 한편, 전문성이 부족한 분야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성장의 길을 도모하기 위한 자기계발이다. 인문학적 철학과 사업가적 과단성을 겸비한 자신의 반도체적 DNA를 회사로 이식하겠다는 이야기다.
“도전과 포기(버림), 자신감과 겸손함, 결단과 자성을 때에 따라 자유자재로 발현할 수 있는 반도체적 의식을 우리 조직이 공유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회사는 계속 커 나갈 것입니다”. 냉정과 열정을 함께 품은 그의 눈동자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이슬기 기자/yesyep@heraldcorp.com
김태섭 회장이 걸어온 길
▷1988 데이터베이스 창업 ▷1990~1998 코리아맨파워 대표이사 사장 ▷2003 케이디씨정보통신 대표이사 회장(케이디씨정보통신 인수) ▷2003 케이디씨 회장 ▷2004 영문 코리아IT타임즈 발행인 ▷2004 케이디씨네트웍스 대표이사 회장 ▷2005 국민생활체육 서울시 생활체조 연합회 회장 ▷2006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산학협동위원회 부위원장 ▷2009~ 국제경영원 교수 ▷2010~ 한국리얼3D콘텐츠제작자협회 회장 ▷2010 바른전자 대표이사(바른전자 인수) ▷2010~ 바른전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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