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켰던 지난 11일, 당사자인 김이수 후보자는 지구 반대편인 유럽 리투아니아에 있었다. 세계헌법재판회의 4차 총회를 위해 출국했던 김 후보자는 마침 현지 정부 관계자들과 아침식사를 겸한 간담회에 참석하던 중 이 소식을 접했다. 다음날 김 후보자는 세계헌법재판회의 총회에서 90여개국 300여 명의 대표자들을 상대로 기조연설을 했다. 지난 3월 현직 대통령에 대한 파면결정을 내린 국가의 대표로 참가자들 큰 관심을 끌었던 김 후보자의 명패에는 ‘Acting President(소장 권한대행)’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낙마는 벌써 세 번 연속이다. 2006년 전효숙 헌법재판관이 소장에 지명됐지만, 지명 시점에 재판관 직을 유지하지 않았다는 논란이 일어 자진 사퇴했다. 2013년 헌재소장에 지명된 이동흡 후보자도 특정업무비를 사적으로 사용한 사실 등이 문제가 되면서 후보자직을 물러났다. 전자에선 140일, 후자의 경우 80일 정도의 헌재소장 공백기가 생겼다.
김이수 후보자의 낙마로 헌재소장 자리는 현재까지 238일째 공석이다. 이번에는 명확한 사유도 없다. 청와대와 여당은 지난 6월 국회 인사청문회 이후 3개월 동안 김 후보자의 국회 동의를 위해 별다른 눈에 띄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회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이후 캐스팅 보트를 행사했던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우리가 결정권을 가졌다”며 의기양양했다.
반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법부 공백을 막아달라’고 국회에 거듭 요청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도 야당과 대립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나왔던 ‘땡깡’ 발언을 사과하며 자세를 낮췄다.
여권에선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헌재소장이 희생된 건 유감이지만, 그로 인해 대법원장 인선이 수월해졌다는 반응도 나온다. 정치적 셈법으로만 따지면 헌재소장보다는 대법원장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다.
개별사건을 처리하지 않는 헌재와 달리 법원은 국회의원들의 직을 박탈할 수 있는 사안을 심리한다. 당장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성완종 리스트’ 사건도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헌법재판소에 소속된 헌법연구관 수는 80여명에 불과하지만,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판사 수는 3000여 명에 달한다. 헌재소장은 9명의 재판관 중 한명에 불과하지만 대법원장은 다른 대법관 13명을 모두 지명하는 우월한 권한을 누린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도 대법관 중에서 나온다. 현실적인 권력 크기를 저울질한다면 비교대상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헌재는 권력기관이라기보다 입법과 행정, 사법으로 나뉘는 ‘3권’을 지탱하는 시스템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국가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위헌 결정을 내리고, 국가 기관끼리 분쟁을 벌일 때 권한쟁의 심판을 담당하는 곳이다. 3권이 국가 권한을 행사하는 ‘선수’라면 헌재는 직접 플레이에 참여하지 않는 ‘심판’에 가깝다. 선수들이 제대로 뛰려면 공정한 판정이 나올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 심판은 능력 못지 않게 권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헌법은 헌법재판관 9명으로 사건을 심리하고, 그 재판관 중에서 헌재소장을 정하라고 명문규정을 뒀다. 하지만 헌재소장 자리가 8개월 가까이 공석일 뿐만 아니라 이유정 헌법재판관 후보자 낙마 이후 헌재가 재판관 8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도 아직 구체적인 후임 인선 논의는 없다.
헌재는 겉으론 ‘국회의 뜻을 존중한다’고 표시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앓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 관계자는 “헌재소장 후보자 때 대법원장 만큼만 신경써줬으면 국회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이수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은 단 2표가 모자라 부결됐다. 여전히 정치권은 대법원장 공백사태를 막은 데 안도하고 있다. 일부에선 ‘계속 권한대행으로 가도 큰 문제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호남홀대론’을 이야기하며 다투고 있지만, 헌재야 말로 ‘헌법재판소 홀대론’을 꺼낼만 하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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