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 나온 책 <봉달이의 4141>.
2010년에 나온 책 <봉달이의 4141>.
27일 중고등학교 탁구 최강전에서 첫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손석현(왼쪽)과 파트너 유한나. [사진=월간탁구 더핑퐁]
27일 중고등학교 탁구 최강전에서 첫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손석현(왼쪽)과 파트너 유한나. [사진=월간탁구 더핑퐁]

# 이봉주는 선수시절 훈련 중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다. 눈빛이 마주치자마자 둘(?)은 서로 놀라 걸음아 나 살려라 뛰었다. 마라토너니까 어디 숨는 것보다 나을 수도. 문제는 다음. 당황한 탓에 무작정 뛰었는데, 양쪽(?) 모두 정신없이 뛰다보니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고. 2010년에 나온 <봉달이의 4141>라는 책에 실린 에피소드다. 이 책은 2009년 전국체전에서 41번째 풀코스 완주(그것도 1위)를 끝으로 은퇴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을 담았다. 이봉주는 ‘성실함의 화신’이다. 멧돼지와 마주쳐도 방향은 나중이고, 일단 성실하게 달아날 정도다. 그는 현역시절 어쩌다 새벽 2~3시까지 술을 마셔도 5시에 일어나 2시간가량 뛰었다. 심지어 신혼여행 때도.# 차례로 한국 마라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동갑내기 친구 황영조와 이봉주(48)를 놓고, 흔히들 천재형과 노력형의 표본이라고 한다. 나름 일리가 있지만 황영조도 짧은 선수생활 동안에는 엄청나게 노력했기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소년등과(少年登科)’와 ‘대기만성(大器晩成)’라는 비유는 조금 낫지만, ‘소년등과’가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 중 첫 머리에 놓이니 이것도 황영조에게 좀 야박하다. 조숙조로(早熟早老, Soon ripe, soon rotten)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22살의 올림픽 금메달(1992년)을 포함해 단 8번만 풀코스를 완주하고 26살에 은퇴한 황영조에 비해, 짝발 등 여러 핸디캡을 딛고 우리 나이로 마흔까지 선수생활을 한 이봉주는 확실히 ‘노력형 대기만성형’이라는 사실이다. 올림픽(1996년 은메달)만 제외하면,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아시안게임 2연패(1998, 2002년), 한국기록(2000년) 등 모든 면에서 황영조를 넘어섰다. 이쯤이면 그냥 ‘이봉주형(型)’과 ‘황영조형’으로 쓰면 족할 듯싶다. # 지난 27일 안산에서 끝난 제2회 중고등학교 탁구최강전의 혼합복식에서 손석현(17 아산고)이라는 고교선수가 혼합복식에서 우승했다. 결승에서 문산수억중의 유한나와 호흡을 맞춰 남성빈-노푸름 조(부산체고)를 3-0(11-6, 11-6, 11-9)으로 이겼다. 손석현에게는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다. 작은 대회에서 무명선수가 ‘어쩌다 한 번’ 우승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앞서 장황하게 이봉주의 얘기를 언급할 만한 사연이 하나 있다.

# 지난 12월 23일 국내 최고 권위의 제71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에서 초등학생이 고교생을 꺾어 큰 화제를 낳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초등학생은 한국 탁구의 레전드였던 오상은(미래에셋대우 코치)의 아들 오준성(오정초 5년)이었기에 ‘부전자전’으로 더욱 대서특필됐다(오준성은 기세를 이어 2라운드에서 실업팀 선수까지 이겨버렸다). 신동(神童)의 탄생은 의미가 있지만, 기념비적인 망신을 당한 고교생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바로 이 고교생이 손석현이었다. # 손석현은 한국여자탁구의 전설 중 한 명인 이수자(58 미국거주)가 이모할머니이고, 아버지 손범규(SBS 아나운서) 씨는 한국중고탁구연맹회장인 ‘탁구집안’ 출신이다. 나름 열심히 했지만 웬만한 성적은 집안내력을 볼 때 명함을 내밀 수준이 못 됐다. 예민한 청소년기 ‘아버지가 회장이니 백이 든든하겠다’는 비아냥도 견뎌야 했다. 몇몇 못된 어른들은 면전에서 ‘황태자’ 운운하며 망신을 주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초등학생에게 진 것이다. 이쯤이면 쉽게 극복할 만한 일이 아니다. # “(초등학생한테 진) 그때 기분요? 말하기 어렵죠. 정말 창피하고, 힘들었죠.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운동했어요. 그래서인지 다행히 슬펌프를 겪지 않았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이제 누구에게 져도 더 큰 망신은 아니겠다라고 생각하니, 경기력이 더 좋아졌어요. 참 묘하죠?” 27일 우승 후 손석현은 이렇게 말했다. 뭐 어렵게 ‘운동은 실패를 극복하는 아주 좋은 수단이고, 스포츠는 실패를 가르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스포츠의 교훈을 두 달여 기간에 고등학생 손석현이 제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상화(28)를 따뜻하게 위로해 큰 감동을 준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31)도 대기만성형 스타다. 자신보다 어린 이상화가 밴쿠버와 소치 올림픽에서 ‘빙상여제’로 호령할 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네덜란드 유학을 떠났고, 기량이 일취월장했고, 평창에서 일본의 ‘주장 징크스’마저 날려버리며 금메달을 땄다(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그렇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아서 그렇지, 스포츠의 세계에는 한 명의 우승자 뒤에 수많은 패자가 존재한다. 경쟁을 강조하는 우리네 학교나 사회에서 그렇듯이. 그런데 어쩌면 ‘패자’보다는 '도우미'나 ‘파트너’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게다. 참 많은 이들이 미래의 1등을 꿈꾸며 지금의 우승자를 돕고(혹은 함께하고) 있을 뿐이다. 잘 모르겠다. 손석현이 향후 이봉주나, 고다이라처럼 노력형 대기만성형으로 크게 성공할지. 지금은 그저 작은 축하를 전하고 싶다. 우승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참 소중한 경험을 했다는 것에 대해.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안산)=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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