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첫 현장출신 여성임원 포스코 김희 생산기술기획그룹장…자동차 강판 전문 제철소 기반 닦아…“차가운 쇠를 만들때도 사람 마음 얻는 게 가장 중요”

용광로에서 용암처럼 흘러나오는 시뻘건 쇳물,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을 내며 두꺼운 쇳덩이를 밀어내는 압연 설비. 우리가 흔히 떠오르는 제철소의 모습이다. 이 광경에서 무전기를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만 30년을 제철소 현장에서 살아온 김희(52) 포스코 생산기술그룹장(상무)은 이런 생각이 편견임을 증명하는 ‘진짜 철강인’이다.

▶포스코 여성 대졸공채 1기=김희 상무는 지난해 말 철강업계 최초로 제철소 현장 출신 여성임원이 됐다. 우리보다 철강업 역사가 훨씬 긴 일본에서는 여전히 제철소 현장에 여성이 접근하는 것조차 터부시하는 상황이다. 그런 만큼 그가 어떻게 제철소 현장에 발을 들여놓고 갖은 편견을 이겨내고 임원이 됐는지 관심이 모아질 수 밖에 없다.

그는 1990년 포스코 철강 생산부 내 첫 여성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포스코가 대졸 공채 중 처음으로 여성 이공계 직군을 뽑은 덕분이다. 이때 뽑힌 여성 이공계 직군 중 제철소 현장으로 보내진 건 김희 상무를 포함한 10명 뿐이었다. 당시 대졸자라면 대부분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그래도 여직원은 비서직이나 사무직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 시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대를 진학할 때나 포스코에 들어올 때나 엔지니어 중에 여성이 이렇게 적은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적어도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은 있을 줄 알았죠.”

처음 철강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유에 대해 묻자 김희 상무는 이렇게 답했다.

그의 기억에 아버지는 여성이라고 해서 교사나 공무원 같은 일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분이다.

그는 “여수여고 시절 여학생으로는 드물게 이과를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실용적이고 생산성 있는 일로 사회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은 1986년 홍익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진학할 때까지 이어졌다. 컴퓨터가 도입되고 사무자동화가 시작되던 때다. “산업공학과는 이공계와 경영관리를 합친 전공이라 기계를 직접 만지는 기계공학과 같은 학과보다 더 큰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게 김 상무의 설명이다.

▶여성이기보단 ‘철강인’ 되기=“광양제철소에서 철강 엔지니어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은 큰 행운”이라고 그는 말했다. 광양제철소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막내 엔지니어의 아이디어나 제안도 실현 가능성에 따라 쉽게 수용됐기 때문이다.

광양제철소는 그가 입사한 시기에는 2기 공장을 짓고 막 생산을 늘려나가던 때였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공장이 조금씩 커질수록 나도 함께 커나가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제철소 생산부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제철소 현장 직원들은 용광로에는 여성이 접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쇳물을 생산할 때는 부정탈까봐 개고기조차 입에 대지 않는 직원들이 그의 등장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기회가 주어질 때 하나라도 더 배우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하지 않는 게 현장에서 살아남은 비법”이라고 그는 말했다. 크레인을 직접 타서 자재와 원료를 옮기는 데 드는 시간을 타임워치로 직접 재고 수천℃를 넘나드는 열연 가열로 위로 올라가 운전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순간 “김희는 남자들도 꺼리는 일을 하려고 한다. 성과를 낸다”는 말을 듣게 됐다. “결국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건 나의 성별이 아니라 내가 이뤄낸 성과 덕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첫 여성 제강공장장=그는 2012년 2제강공장장이 되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김희 상무는 “기술 교류를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업체쪽에서 ‘어떻게 철강공장장에 여성을 임명할 생각을 했냐’고 감탄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2007~2010년 광양제철소 생산관제과장 시기가 없었다면 이런 성공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생산관제과장은 공항 관제탑과 같은 관제센터에서 용광로서부터 후처리 공정까지 전 공정을 지휘하는 역할이다. 이곳에서 각종 수치와 CCTV, 현장에서의 보고로 현장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대응해야 제품 생산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

당시는 광양제철소가 자동차 강판 전문 제철소가 되기 바로 직전이었고 2제강공장은 연간 600만~650만t을 생산해 자동차 강판 시장 주도권을 쥐라는 특명을 받았던 때다. 태풍이라도 올라치면 자다가도 관제센터로 뛰쳐가야 했고 화재가 나면 50만t이나 비는 생산량을 다른 설비를 돌려서 채워야 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포스코는 2009년 초 도요타에 철강재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강판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

당시 경험은 2제강공장장으로서 포스코 직원 250명과 외주 업체 직원 500~600명을 지휘하는 데 고스란히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는 딸 등교 준비도 챙겨주지도 못 했고 명절에 고향도 제대로 내려가지 못 했지만 되돌아보면 나의 능력을 담금질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품질관리 이전에 사람관리=그가 맡은 생산기술전략실은 그동안 제철소 현장 인력들이 쌓은 생산 노하우에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최신기술의 도입을 지원하고, 핵심 연구개발 성과를 적재적소에 적용하여 사-소간 시너지를 창출, 이를 통해 최대한 많은 철강 제품을 높은 품질로 생산하도록 하는 현장의 수뇌부 임무를 맡고 있다.

최근 철강업계에서는 생산 과정에서 얻어지는 각종 수치를 모아 최적의 공정을 짜는 스마트 팩토리가 화두다. 사람의 실수를 기술을 통해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김희 상무는 “차가운 쇠를 만들 때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여전히 기술보다 사람을 우선한다.

사실 슬라브 정정공장장 시절, 제품 품질이 편차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각종 신기술을 적용해도 품질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스카핑 담당 인력들의 사기 저하가 저하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스카핑은 쇳물이 정제 후 고체화 되는 과정에서 표면 품질관리를 하는 후공정이다. 이 작업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코일을 생산하는 압연 과정 등에서 제품의 불량률이 크게 증가한다. 하지만 당시 직원들은 자신의 작업이 전체 공정 중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자신들이 조직의 주류도 아니라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을 느낀 그는 직원들을 수시로 찾아가 그들의 불만 사항이나 애로점을 들었다. 때로는 집에 불러다 밥도 해주면서 직원들이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들도록 최선을 다했다. “젊은 직원들이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는 순간, 그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후배들이여, 쉽게 포기하지 마라”=최근 그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후배 여성 엔지니어들이다. 그의 입사 때와는 달리 이제 제철소 현장에도 여성 엔지니어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후배 엔지니어들이 여전히 철강업계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것은 그로선 가장 안타깝다.

그는, 여성이 소수인 집단에서 “여성은 공장 근무를 하기 힘들다, 현장이 힘들어서 쉽게 포기할 것이다 와 같이 소위 말하는 사회적 통념이 팽배한 곳에서 여성이 이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고울 리 없다” 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것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과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일에 남녀의 구분은 사라진다”라고 조언했다.

물론 이런 충고를 모든 후배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세대가 다른 이들에게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다가 시쳇말로 ‘꼰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흔 초반까지는 후배들을 쫓아다니며 먼저 얘기를 해줬지만 지금은 먼저 충고를 하는 건 자제한다.

하지만 그는 후배들이 언젠가 자신이 느꼈던 고민을 똑같이 느낄때는 찾아와 조언을 듣기를 바란다. “나 때는 조직 뒤에 잠시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런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그는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원호연 기자

사진=이상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