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와 모드’ 내달 1일 개막

열아홉 청년-여든 할머니 이야기

“여섯번의 모드로 살아온 18년...”

무대 지켜봐온 350명 지인에 편지

2003년 처음 ‘해롤드와 모드’를 만나 “여든까지 이 연극을 하겠다”던 배우 박정자의 다짐이 현실이 됐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모드를 연기한 그는 오는 5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모드로 관객 앞에 선다. 박정자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며 “여든이 돼 만난 모드는 더 특별하다”고 말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2003년 처음 ‘해롤드와 모드’를 만나 “여든까지 이 연극을 하겠다”던 배우 박정자의 다짐이 현실이 됐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모드를 연기한 그는 오는 5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모드로 관객 앞에 선다. 박정자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며 “여든이 돼 만난 모드는 더 특별하다”고 말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2015년 연극 ‘해롤드와 모드’. [신시컴퍼니 제공]
2015년 연극 ‘해롤드와 모드’. [신시컴퍼니 제공]

“기다린 듯, 기다리지 않은 듯 저는 올해 80이 되었습니다. 2003년을 시작으로 여섯 번의 모드로 살아오는 동안 18년이 지났습니다.” (박정자의 ‘해롤드와 모드’ 초청장 中)

“여든까지 이 연극을 하겠다”던 다짐 같은 바람이 현실이 됐다. 오랜 약속을 이루는 날을 기다리며, 배우 박정자는 350명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18년 전이던 2003년, “해마다 공연하고 여든 살에 모드처럼 끝낼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만 해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 것 같진 않았어요. 이젠 화살 같아. 눈 뜨고 나면 금방 주말이에요. 아무튼 팔십이 된 거야. (웃음)”

올해로 일곱 번째. 다음 달 1일 개막하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19 그리고 80)’(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박정자는 ‘생애 마지막’ 모드를 연기한다. 어느덧 극 중 모드와 같은 나이가 됐다. 박정자가 한 자리를 지키는 동안 여섯 명의 해롤드가 그의 곁을 다녀갔다. 2003년 이종혁부터 김영민(2004), 윤태웅(2006), 이신성(2008, 뮤지컬), 조의진(2012), 강하늘(2015)이 열아홉의 해롤드를 거쳤다. 이번엔 임준혁·오승훈이 연기한다.

연극은 삶에 애착이 없는 열아홉 청년(해롤드)과 생에 대한 의욕이 충만한 여든 할머니(모드)의 이야기를 담는다. N극과 S극처럼 정반대의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는 두 사람. 이들은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다가선 모드에게 해롤드는 마음이 이끌린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봄날, 대학로에서 만난 박정자는 모드처럼 반짝이는 미소로 환히 웃었다. “나무들 뒤치다꺼리 하다 오느라 힘 좀 썼다”는 데도 생기가 가득하다. ‘에너자이자’라는 별칭엔 이유가 있었다.

“여든이 돼 만난 모드”이기에 “더 특별하다”고 한다. “삶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예측할 수가 없어요. 10년 전 윤석화 씨한테 그랬어요. 내가 팔십에 모드를 할 테니, 마지막 공연 연출을 맡아달라고. 그 약속을 했는데, 아무튼 이렇게 된 거지.” 이번 작품의 연출은 윤석화가 맡았다.

나이테를 더해가며 모드를 만났지만, 그에게 모드는 늘 같은 자리였다. “조금씩 달랐을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같아요. 다만 나를 조금 더 내려놓으려고 해요.” 말은 내려놓는다 해도, 욕심은 여전하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가벼워지려고 노력해요. 뭔가를 보여주려 하지 않고, 군더더기를 떼어내려고. 각자가 삶의 무게와 짐을 지고 가는데, 조금씩 덜어놓는 거죠. 치장이 뭐가 그렇게 필요하겠어요.”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후, 일생을 무대에서 살았다. “한 해도 쉬지 않고 공연을 해왔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미련하고 우직한 거예요.” ‘미련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눈길을 주지 않고, ‘연극’이라는 한 길을 걸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것마저도 무기가 됐다”고 한다.

공연이 임박할수록 배우 특유의 예민한 감각이 살아난다. 연습을 앞두곤 어떤 만남이나 약속도 가지지 않는다. 배우로 살아온 지난 60년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지나칠 정도로 완벽주의예요. 한창 연습할 때는 특히 그래요. 아주 예민하다 보니 식구들도 날 피해. (웃음)”

수없이 무대에 올랐어도, 배우의 삶은 녹록치 않다. 꿈속에서도 대사를 줄줄 욀 정도로 촉수를 곤두 세우고, 끊임없이 주어진 역할을 마주한다. 가끔은 악몽 같은 일화가 스친다. “일본에서 공연할 때 필름이 딱 끊긴 적이 있어요. 정말 끔찍해요. 모드는 해롤드한테 ‘사람은 실수할 권리도 있는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내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요. 그런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니 괴로워. 그래도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문득 그는 오래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1987년 40대 중반, 배우 최불암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김혜자 김주승 주연의 ‘19 그리고 80’(‘해롤드와 모드’의 당시 제목)을 처음 보던 날이다. “작품이 너무 좋더라고요. 모드가 내 롤모델이에요. 그 때 좀 더 나이 먹어 이 공연을 해야지, 마음에 품고 있었어.” ‘연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보내니 마지막 모드를 만나는 길 위에 서게 됐다.

“우리가 사는 동안, 무심한 것 같지만 뭔가 탁 오는 순간이 있어요. 왜 ‘필’이 온다고 하잖아요. 내가 계획하지 않아도 운명처럼 와요. 아무튼, 문득, 그렇게 와요. 운명처럼.... 그래서 ‘문득’, ‘운명처럼’ 그런 말을 좋아해요. (웃음) 모드도 ‘문득’, 그렇게 온 거죠.”

운명처럼 찾아온 이번 공연엔 여든 살인 된 그의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도 담았다. 출연료도 받지 않았다. “대신 공연 티켓을 달라고 했어요. 내 무대를 지켜봐 온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거든.” ‘18년 전의 약속’이라고 쓴 초대장엔 무대에서 보낸 배우의 마음을 담았다.

“배우에게 자신과 하나 될 수 있는 특별한 배역을 만난다는 것만큼 행운이 또 있을까요.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 속에서 이제 모드를 놓아주려 합니다. 동시에 못다 한 모드의 이야기는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그는 “내 인생 ‘마지막 모드’의 시간에 입회해 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며 “생애 가장 아름다운 오월에” 편지를 띄웠다. “이 표를 받고 여길 가야 돼, 말아야 돼 하는 사람도 있겠지. 어떻게 다 기뻐서 오겠어요. 그래도 내 마음이니까....(웃음)”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