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첫날, 너무나도 무섭고 죽을 만치 겁이 났어요.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죠. 전쟁중이었으니까요.”
세계적인 피아노 거장이자 음악교육자로 유명한 구순을 훌쩍 넘긴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한국전쟁을 얘기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때로 아이처럼 소리내 울기도 하고, 눈가가 붉어지며 금세 맑은 눈이 그렁그렁해지기도 한다.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괴로워 묻어뒀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누가 클래식을 듣겠냐 했지만 클래식이 뭔지도 몰랐던 병사들은 그의 연주에 눈물을 흘리고 위로를 받았다. 그는 연주하는 동안 언제든 전투할 수 있도록 옆에 총을 놓고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100회가 넘는 연주를 했다.
전역 후,1955년 서울교향악단과 협연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60년 연주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가 4.19혁명을 직접 목격했다. 모든 연주가 취소되자 그는 피아노를 옮겨달라 부탁해 서울대병원에서 실려오는 부상자들을 위해 연주를 했다. 그는 그들의 편에 함께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절대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격동기를 드물게 몸으로 겪은 그는 ‘피아노를 정복한’ 피아니스트로 놀라운 성취를 보여줬지만 50세에 무대와 작별했다. 무대공포증에서 벗어난 그는 이후 가르치는 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레슨을 받은 이들은 하나 하나의 음이 말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되고, 내면에서 이는 느낌을 손가락을 통해 표현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여린 음과 여운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기술과 감성을 아우르는 레슨은 독보적이다. 그는 학생들이 막혔던 부분을 해냈을 때, 감사의 물결이 마음에 넘친다고 말한다.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감사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헐리우드 배우 에덴 호크가 제작·감독한 다큐멘터리 ‘세이모어: 인트로덕션’에서 음악계의 상업성과 무대에 대한 두려움, 창작에 대한 열망으로 무대와 작별한 뒤, 비로소 조화로운 삶을 얻게 됐다고 털어놨다.
호크가 세이모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건 우연한 만남에서였다. 연기에 회의가 들면서 위기에 빠진 때, 친구 집에서 우연히 세이모어를 만나 그의 말에 크게 고무됐다.
세이모어는 재능이 뭐든 각자의 재능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은 전쟁터, 한국전쟁에 참가한 첫 날 그는 두려움과 행복, 천국과 지옥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새벽 5시에 일어났는데 안개가 자욱했어요. 식당에 들어가서 땅콩이랑 먹을 걸 좀 가지고 밖으로 나갔어요. 땅콩을 먹다보니 짙은 안갯속에서 조그만 코 하나가 불쑥 나왔죠. 새끼 사슴이었는데 사람의 손을 탄 게 분명했어요. 망설이지도 않고 나한테 다가와서는 땅콩을 든 손에 코를 박았는데 그 순간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왔구나 싶었어요. 거긴 천국이었어요.”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세이모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온라인으로 헌정 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눈물이 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이들이 많다. 그가 누르는 한 음 한음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아득한 슬픔을 길어올린다.
호국의 달에 노장이 들려주는 브람스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듯하다.
이윤미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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