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자수성가한 J.D.밴스는 어린시절, 몰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의 가난하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랐다. 언어 및 신체 폭력이 일상인 가정, 엄마의 약물중독과 복잡한 결혼 생활 등으로 비참한 생할을 하며 학업을 포기할 정도였으나 주위의 만연한 절망과 자포자기를 딛고 마침내 성공의 사다리에 오른 인물이다.
자신이 살아온 백인 저소득층 일반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힐빌리의 노래’로 잘 알려진 그의 삶은 사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극소수의 사례에 불과하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과 보건경제학의 권위자 앤 케이스는 저소득 저학력 백인층에서 나타나는 자살과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의 급증에 주목한다.1999년부터 2017년까지 이런 죽음은 60만명에 이르는데, 그중 2017년 한 해 사망자가 15만8000명이다. 2018년 사망자도 엇비슷한데, 위세가 코로나19 못지않다. 둘은 이를 ‘절망사’라고 부른다.
경제학의 두 거장은 공저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사회적 유행병’, 절망사가 왜 미국을 강타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경제적·사회적 원인을 파고든다.
저자는 이들 사망자 리스트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4년제 학위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거의 모든 절망사가 증가한 것이다. 특히 자살은 20세기엔 통상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한 현상이었는데, 21세기 자살은 저학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4년제 학위가 미국사회 양극화를 가르는 표지라는 게 이 책을 관통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학위가 없는 사람은 고통, 건강 악화,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정도가 커지고 있고, 일하는 능력과 사교성도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격차는 소득, 가족의 안정성, 지역사회로 확대되는 추세다.
저자는 미국 생산가능인구의 62%를 차지하는 비히스패닉계 백인들의 삶의 기초를 조금씩 무너뜨린 외적인 힘을 하나하나 살펴간다.
무엇보다 세계화와 기술변화로 일자리의 감소와 임금하락은 저학력 백인들의 삶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저임금 일자리의 상당수가 하청업체로 넘어간 것도 악화요인이다. 교육을 덜 받은 백인들의 혼인률은 떨어지고, 교육을 덜 받은 백인 어머니의 다수가 적어도 한 명의 혼외자식을 두는 등 가정의 토대도 불안정해졌다. 저자는 일자리는 단순히 돈이 나오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삶의 의식과 관습, 일상의 기본임을 강조한다. 일자리를 없으면 결혼과 공동체가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의미와 존엄성, 자부심, 자존감을 잃게 되며, 이는 금전적 손실 뿐만 아니라 절망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의료비 지출은 이들의 경제에 큰 부담을 지우고 삶의 질 마저 빼앗아가는 재앙이다.
세계화와 기술변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노동시장의 특수성을 지목한다. 각종 로비로 기득권자를 보호하는 독점과 특약, 특혜, 세금감면, 규제 등 지대추구를 통제하지 못한 데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한 예로, 의료시스템의 경우 미국은 세계에서 의료비가 가장 비싸지만 서비스는 낮다. 제약회사, 의료기기 제조 업체, 보험사, 독점적 병원의 이익을 대변, 이들의 부를 늘려주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외국 의사들의 배제, 의과대 증원 반대도 들어있다.
저자는 데이터를 중심으로 근거를 제시하며, 대안을 내놓는데 부유세나 기본소득에 찬성하진 않는다. 중간계층 이상의 부를 빼앗아 배분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독점과 배타적 이익, 규제 이익 등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불공평한 지대이익이라는 것이다.
책은 좌파나 우파나 불평등을 해소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탁상공론에 그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미국의 사례이지만 우리나라를 비롯, 여타 국가들에게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앵거스 디턴·앤 케이스 지음, 이진원 옮김/한국경제신문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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