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의 화상찬과 어우러진 '세한도' 계보 이어
[헤럴드경제=김능옥 선임기자] 추사 김정희‘세한도’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닫힌 창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방안이 보일뿐이다. 사람 없이 집만 그림으로써 쓸쓸함을 극대화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세한도’에서 바람소리가 느껴진다.
1844년 8월(추정) 제주 유배중인 추사는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보낸다. ‘세한도’를 받아든 이상적은 추사에게 감동의 편지를 보내고 청나라 연행 길에 올랐다. 1845년 1월 13일 연경에 도착한 이상적은 청나라 친구들의 환대를 받는다. 청나라 지인들 17명은 이상적을 위해 1월 13일 연회를 베푼다. 이 자리에서 이상적은 ‘세한도’를 내놓고 그림을 감상하며 제영(題詠)을 부탁한다. 장악진, 조진조, 반준기, 반희보, 반증위, 풍계분, 조무견, 진경용, 주익지, 장수기, 장목, 장요손, 오찬 이렇게 13인은 추사와 이상적의 우정을 기리고, 이상적의 절개를 칭송했으며, 추사의 외로운 상황을 가슴아파하며 위로하며 ‘화상찬’을 보냈다. 여기에1949년 정인보, 이시영 그리고 오세창의 발문이 더해진다. 이렇게 우리가 보는 ‘세한도’는 추사의 그림과 16인의 화상찬이 종합해낸 ‘추사의 원본’을 초월한 ‘또 다른 세한도’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8월, 한국화 화단에서 인물화로 일가를 이룬 작가 김호석의 인물초상화 ‘우리는 누구인가’와 14인의 작품평이 어우러져 책(사유의 경련-이 그림 하나의 화론, 도서출판 선)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림이 매우 낯설다. ‘세한도’에 인물이 없다면, 김호석의 이 작품엔 인물초상화의 핵심인 ‘눈’이 없다. 그는 엮은이의 글에서 “인물화의 핵심인 눈을 생략해 버린다면 아니 눈을 지워버린다면 아니 아예 그리지 않는다면 그건 인물화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일까?” 라고 스스로 묻고 있다. 한마디로 파격이고 전복이다. 글을 쓴 정근식, 김종구, 김인성, 이태호, 이병호, 변영섭, 원철 스님, 일감 스님, 김성동, 장요세파, 박종구, 이경철, 임우기, 강득희는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그림 평은 역사, 철학, 종교를 넘나들며 밀도 높고 웅숭한 깊이가 느껴진다. 아울러 김호석의 그림에 대리보충(supplement)의 역할을 한다. 14인의 글은 김호석의 그림에 미끌어져 들어가 그 그림의 공백을 메우면서 그 그림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근식 서울대사회학과 교수는 “김호석은 역사적 인물의 관점이 아니라 감상자가 주인공의 마음이나 몸속에 들어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도록 비워둔 것”이라고 평했다. 이병호 온샘 주교는 “블랙홀 뒤에 있고, 하는 일도 정반대라는,/찾기는 쉽지 않겠지만/인간의 상상력은 마침내 가 닿는 지점./온갖 쓰레기,/혼돈을 품어 다시 애초의 모습으로 돌려서 내놓는다는/‘화이트홀’/그것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비트겐슈타인 전공자다운 평을 적었다. 장요세파 마산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 수녀는 장장 62쪽에 달하는 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만이 인간의 탐심의 자리를 제대로 보게 하고 타인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탐심을 내려놓게 해준다”며 김호석의 그림에 기대, 평화를 향한 우리의 몸부림, 마음부림을 호소한다.
16편의 화상찬과 어우러진 ‘세한도’처럼 김호석의 인물초상화 ‘나는 누구인가’도 14인의 글과 엮여 비로소 한 몸으로 재탄생했다.
kn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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