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신체와 여성의 역사를 강조하며, 추상화를 통해 강력한 감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글로벌 미술 정보 플랫폼인 아트시는 지난해 도드라진 활동을 보였던 10명의 여성 추상회화 작가를 선정하며, 이같이 평했다. 왕 시야오(Wang Xiyao·31)를 비롯해 라우렌 퀸(Lauren Quin·31), 라이언 코스버트(Ryan Cosbert·24)와 함께 도나 후앙카(Donna Huanca·43)도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남성적 회화 장르’로 인식되는 추상 회화에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 선봉에 있는 도나 후앙카의 개인전이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에서 열린다. 아트부산 등 국내 페어에서 작업을 선보인 바 있으나,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만날 수 있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블리스 풀(Bliss Pool)’이라는 주제로 작가는 삶의 순환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장에 소환한 유우니 사막
도나 후앙카는 조각, 설치, 회화, 퍼포먼스를 자유자재로 넘나 들며 몰입감 넘치는 종합 예술공간을 연출한다. 그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감을 동원해야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테인레스 조각과 그 뒤로 높이 7m에 달하는 대형 곡면의 벽에 걸린 12점의 회화가 관객을 압도한다. 맞은편에는 높이 3m의 곡면 벽이 설치됐고, 그곳에도 4점의 대형 회화가 자리 잡았다.
두 개의 대형 회화 사이에는 타원형 모양의 하얗고 낮은 무대가 있다.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끌어들이는 금속 조각들이 그 위에 마치 배우들처럼 서있고, 보디 페인팅을 한 나신의 여성 모델들이 그 조각 주위를 배회한다. 천천히 느린 속도로 걷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가끔은 관객들의 눈을 피해 조각 사이로 숨어 든다.
“비정형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스페이스K 서울의 건축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설치했다. 높고 낮은 회화는 건축의 선과 그 흐름을 같이하고 가운데 놓인 원형의 무대는 엄마의 자궁처럼 관객을 품는다” 순백의 원형 무대는 볼리비아의 유우니 사막을 떠올리게 한다. 거울처럼 하늘을 대칭시키는 유우니처럼 그의 작업은 미술관 건축과 조응한다.
막강한 시각의 자극에 핸드폰을 꺼내 장면을 담으려는 순간, 자꾸 내 자신의 모습이 금속 조각에 비친다. ‘거울’효과를 활용해 관객을 작품에 참여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다. 퍼포먼스를 주요한 매체로 활용했던 작가는 코로나19 이후 더 이상 이같은 시도가 어려워지자, 거울을 꺼내들었다.
“관객들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조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관찰하는 객체가 아닌 전시의 주체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시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목격자이자 참가자이며 외부인이며 동시에 외부인이다” 퍼포먼스와 설치조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후각과 사운드, 강력한 기억 보조제
시각이 물러가고 나면, 청각과 후각의 자극이 찾아온다. 스모키한 향과 물소리가 그 주인공이다. 무대 한 가운데와 7m 대형 페인팅 뒤에 스피커가 숨겨져 있어 얼음, 액체, 기체 상태로 변하는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물의 모습을 소리로 담았다” 물은 순환을 상징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향기는 강력한 기억의 보조제다.
“소리와 향은 고정된 이미지로 기록할 수 없다. 고정된 이미지인 회화작업에 표식을 남기고자 향을 사용한다” 이번엔 남미 지역에서 서식하는 팔로 산토 나무와 태운 머리카락을 혼합해 향을 만들었다. “제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향은 깃털 타는 냄새, 머리카락 타는 냄새, 가죽, 나무, 물 냄새 였다. 한 편의 시와도 같다”
작가는 기억을 통해 시간을 축적한다. 특정 장소와 시간에서 직접 보아야만 하는 퍼포먼스를 페인팅으로 아카이빙한다. ‘나는 몸을 하나의 스케치 패드로 생각한다’는 작가는 모델의 몸에 공들여 그림을 그리고, 퍼포먼스에 들어가면 이를 사진으로 찍은 뒤 일부를 클로즈업해 캔버스에 프린트한다. 이를 밑그림 삼아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전의 퍼포먼스가 회화로 이어지며 전시는 과거의 기록과 연결된다.
미술사의 틀에 나를 가두지 말라
작가는 아트시에서 선정했듯 대표적 여성 추상 미술 작가로 꼽히나 정작 본인은 그 같은 구분을 거부한다. 여성주의 작가로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 “젠더 지향보다는 그냥 인간, 인간 몸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을 인간 대표로 세웠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미술사에는 늘 승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승자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 같은 룰을 거부한다”고 단언한다.
삼단 같은 검은 웨이브 머리에 패치워크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작가는 까다롭고 또 예민하게 굴었다. 반항적인 모습은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친다. 순환과 시간, 표면과 정체성, 신체와 감각을 탐구하며, 동시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질문한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 현실에 집중하세요”라고. 전시는 6월 8일까지 이어지지만 퍼포먼스는 3월 9일부터 12일까지 나흘 간만 진행한다.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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