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法廷)
‘변호인’ ‘집으로 가는 길’ 등 최근 터부시되던 법정영화 쏟아져
영화 속 한국 사회의 법정은 상식·양심·정의를 세우는 대신 부·권력의 위계질서 확인하는 곳
법정. 법원이 소송절차에 따라 송사를 심리하고 판결하는 곳이다.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내란죄도, 흉악무도한 살인죄도, 한때는 서로 좋아 죽고 못살 것처럼 보이던 부부의 이혼도, 평생 남이 모은 돈 ‘호박씨 까먹듯’ 한입에 톡 털어넣은 비열한 사기죄도, 법정에서 그 중함과 가벼움이 결정된다.
국가 중대사로부터 개개인의 소사들까지 한 사회의 천태만상이 펼쳐지는 곳, 온갖 희비극의 풍경이 펼쳐지는 법정은 우리 인생의 ‘만화경’이자, 한 사회의 ‘축도’이다.
‘법정드라마’에 유난히 인색했던 한국영화였지만 최근 들어 주인공들의 법정 출두가 부쩍 잦아졌다. 아마도 법적으로 민감하고 논쟁적인 사안을 다룰 만큼 우리 사회와 영화계가 성숙하고 세련됐다는 방증일 것이다. 아니라면 한국 영화가 대리하지 않고는 안 될 만큼 우리 국민들이 법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한국영화에 펼쳐진 법정의 풍경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은 대부분 쓰리고 억울하고 화나고 분통 터지며, 아주 가끔 짜릿하고 통쾌하다. 법정에서 오가는 대화와 벌어지는 논쟁은 반쯤은 우스꽝스럽고 반쯤은 슬프다.
“증인의 연구소에서는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불온 서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저자가 소련에 체류했던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주요 근거 중 하나였는데, 과연 증인은 이 책을 읽어보기나 했습니까?”
오는 19일 개봉 예정인 ‘변호인’에서 1980년대 부산 지역 최대 반국가조직 사건의 변호를 맡은 송우석(송강호 분)이 증인 심문을 하는 장면의 하나다. 영화 속에서 당시 검찰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을 반국가 활동 및 조직 결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는데, 그 증거 중 하나가 ‘피고’들이 탐독했던 ‘불온서적’이다. 송우석 변호사는 문제의 책에 대해 “저자는 (영국) 외교관 자격으로 소련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그의 저술은 공산주의와 상관이 없는 훌륭한 교양학술서로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널리 읽혀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영국 대사관 공식 문서를 공개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12일 개봉한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주인공은 법정에 선다. 그런데 한국이 아닌 프랑스 법정이다. 마약 밀수조직에 깜빡 속아 가방 속에 무엇이 든지도 모르고 코카인을 운반하다 파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먼 타국 땅 감옥에서 2년을 보냈던 평범한 주부 송정연(전도연 분)은 최후 진술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다.
“저는 마약을 운반해 국가와 사회에 죄를 지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지은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의 가족들입니다. 그들에게 아내와 엄마를 돌려주세요.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정부로부터 외면받고 방치돼 고초를 겪어야 했던 여인에게 첫 발언권이 주어진 곳은 프랑스의 법정이었다.
극중 대한민국 정부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진실, 평범한 주부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한 마디는 결국 더듬더듬 배운 프랑스어가 돼야 했다. “주 브 랑트레 셰 무아”(Je veux rentrer chez moi)
영화 속에서 ‘존경하는 판사’들은 대개 ‘장님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의 세월을 보내는 층층시하 며느리처럼 진실과 정의에 동문서답과 현문우답,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솔로몬’을 대신하는 것은 무고하고 억울한 약자들이다. ‘도가니’에서 악질 사학재단 소유주이자 장애아 특수학교 교장의 성폭행 범죄를 은폐하기 급급한 재판관은 쌍둥이인 용의자 형제를 나란히 앉혀 놓고 피해자인 어린 소녀에게 “누가 성폭행을 했냐”는 가해자 측 변호인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허락한다. 말 못하는 어린 소녀는 수화로 답한다.
“교장선생님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수화가 있어요.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 제가 이 말을 수화로 하니까. 얼굴을 찡그린 사람이 (성폭행을 했던) 교장 선생님이에요.”
‘부러진 화살’에서 김경호 교수(안성기 분)의 변호사(박원상 분)는 “부러진 화살을 증거물로 제출했는데 검찰에서는 멀쩡한 화살을 내놓았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 아니냐”고 따지고, “(석궁 피해자의 옷에 묻었다는) 피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혈흔 감정 신청하지 않았느냐, 그걸 기각시켜놓고 왜 나에게 물어보느냐”고 항변한다.
결국 한국 영화에서 재현된 한국의 법정이란, ‘부러진 화살’의 주인공 김 교수의 말처럼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기 십상이다. 그러면 법이 나쁜가, 법정이 잘못된 것일까? ‘부러진 화살’에서 김 교수는 “법은 지키지 않아서 그렇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가 아름답다던 법, 그중 최고인 헌법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변호인’의 송우석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국가란 국민이다”고 웅변한다.
그 말을 빌리자면 법정의 풍경은 과연 누가 나라의 주인인지를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그 주인이 ‘국민’은 아닌 듯하다. 결국 한국의 법정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양심, 정의를 세우는 대신 부와 권력의 위계와 서열을 확인하는 곳이 아닐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지만, 법정에서만큼은 사람이 잘못됐지, 법이 나쁜 것이 아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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