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영상 기자]어제(9일) 퇴근하니 아파트 우편함에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코리안리 박종원 부회장으로 온 편지였습니다.
얼마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박종원 부회장 아시죠? 코리안리 사장으로 ‘15년 5연임’의 신화를 쓰고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이죠.
아마 마지막 인사 편지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역시 봉투를 열어보니 그동안 감사했고, 다시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박 부회장은 편지에서 “제가 소신껏 경영을 펼칠 수 있도록 그동안 많은 격려와 도움을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자긍심도 엿보였습니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코리안리에서 소임을 끝마치고 최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며 “경영이 어렵던 회사에 취임해 직원들과 함께 야성과 도전의 기업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세계 시장을 개척하면서 신바람나게 뛰었고, 그 결과 회사는 신용등급 A에 빛나는 아시아 1위 회사로 성장했으니 지난 시간은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회고했습니다.
편지를 보면서 내내 박 부회장과의 개인적 인연을 떠올렸습니다. 박 부회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료 출신으로 코리안리에 와 무너지기 직전의 회사를 아시아 1위, 세계 10위의 재보험사로 탈바꿈시켰으니 대단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지요. 기자는 그래서 그를 ‘경달(경영의 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경달, 제가 그에게 주는 별칭이었지요.
기자는 2000년대 초 보험을 출입했고, 그때 박 부회장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사장이었죠. 보험 출입이 끝난후에도 인연은 계속 됐습니다. 청와대 출입때도 그를 만났습니다. 그를 만난 것은 일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넘치는 에너지, 젊은이 못잖은 왕성한 호기심, 사회를 바라보는 안정적인 시각 등등 그에겐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뭔가 나른해질때 그를 만나면 재충전의 ‘청량제’를 마시는 느낌까지 들었으니까요.
박 부회장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기자가 그를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꼭 경영 때문은 아닙니다. 경영이야 능력도 중요하지만, 시대적인 환경도 중요하지요. 경영자에겐 운이 필요합니다. 운이 좋으면 경영 성적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박 부회장의 경우 꼭 그렇지는 않지만요.
기자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매우 소신있는 전문경영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코리안리는 대주주(오너)가 있습니다. 이번에 박 부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원종규 전무가 새로운 사장이 됐는데 원 사장은 오너가입니다. 코리안리가 오너경영에 돌입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오너경영이든, 전문경영인 경영이든 기업 자율이고, 좋은 경영 성적표를 내 국가경제에 일조하면 좋은 일이겠지요. 오너경영, 전문경영인 경영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가 기억하는 한 박 부회장은 대주주의 눈치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회사를 책임져 이끌어 성공 모델을 개척한 독특한 사람입니다.
언젠가였을까요. ‘오너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눈치보면 아무것도 못해요. 소신있게, 제 철학대로 회사를 이끄는 것이 중요합니다. CEO는 성적으로 말해주면 됩니다.”
기자는 그것이 그가 15년동안 롱런하면서 5연임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일군 비결이라고 봅니다. 오너 눈치 보면서 소신과 철학은 길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오너에 빌붙어 아양을 떠는 경영인들이 있다면 커다란 깨우침의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 부회장이 경영자로서 또 뛰어난 점은 사람의 본성을 깨우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야성의 인재를 기르는 것이죠. 박 부회장은 그런 점에서 특이한 사람입니다. 안주를 본능적으로 싫어하죠.
회사가 그럭저럭 안정화되니까 박 부회장의 드라이브에 우려의 시선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그만 쉬면서 가자는 얘기도 나왔죠. 그는 그래선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박 부회장이 백두대간 종주를 생각한 것은 이때 입니다. 직원들의 야성을 깨우쳐야 겠다고 생각했죠. 직원들을 데리고 2004년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임직원이 3개 팀으로 나뉘어 그해 지리산을 시작으로 2005년 덕유산, 2006년 소백산 등을 거쳐 2012년 태백산까지 올랐습니다. 물론 싫어하는 직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장(당시)이 솔선수범해 산에 오르니, 죽을 힘을 다해 헉헉대며 따라갈 수 밖에요. 평소 운동을 안하거나, 산행에 약한 직원들은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대표가 앞서 ‘죽음의 산행’을 계획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사고라도 나면 대표가 다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박 부회장이 산행을 고집한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야성을 깨워 활력있는 인생의 중요성을 심어주는 것도 CEO의 한 역할이라는 소명감 때문이었습니다.
얘기하다보니 박 부회장의 너무 좋은 면만 부각한 것 같군요. 사람 평가는 각각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그가 너무 독종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냉정하기 이를데 없다고도 하지요. 사실 그의 속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독종인데가 많습니다. 그에게 밉보이면 만회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원리원칙 잣대가 너무 분명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문경영인으로서 그가 일궈놓은 여러가지 성적들을 보면 우리시대 경영의 교훈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의 인생이 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축구감독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지금까지 성공은 또 다른, 더 큰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했듯이, 끝은 이별이 아니고 성공은 또 다른 도전을 향한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뭔가를 준비하고, 뭔가에 또 도전하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말미에서 “저는 코리안리 부회장으로서 후배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경영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무료 경영컨설팅 등 경영계를 위해 뛰겠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기자는 그가 ‘푹 쉬지’ 않기를 바랍니다. CEO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당분간 재충전을 위해 머리를 식혀야 겠지만, 그 이후엔 다시 경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 바랍니다. 그의 경영 노하우가 사장되는 것은 업계로서도 불행입니다. 무료 경영컨설팅이 됐든, 후배 경영인을 위한 멘토가 됐든 그가 다시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박 부회장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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