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자식 유학에 뿌듯함 언제부터인가 시큰둥해진 아내·딸의 전화 목소리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연약함 영화 ‘에브리데이’ 5년간의 흔적 스크린에 담아 혼자 남은 당신, 남편·아빠 자리는 안전한지…
한국에선 조폭도, 대기업 부장도, 카센터 자영업자도 ‘기러기 아빠’다. 전설적인 로커도, 중견 영화배우도 그래서 ‘나 혼자 산다’. 기러기 아빠란? “1990년대 말 조기유학 열풍에서 생겨난 말로, 부인을 딸려 어린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낸 후 국내에서 혼자 생활하는 아버지를 이르는 말”이라고 시사사전은 친절히 일러준다.
기러기 아빠가 유일하게 기댈 것은 ‘전화’다. 기분 좋으면 좋은 대로 울적하면 울적한 대로 버튼을 누른다.
“아빠한테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 영어로 해 봐!”( ‘전설의 주먹’ 중)
기분 좋다. 타지에서 열심히 공부할 자식도 대견하고,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아들딸 유학시킨 그 자신이 뿌듯하다. 수화기 너머 아이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여보 지금 전화 통화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하자”( ‘즐거운 인생’ 중)
언제부터인가 애도, 마누라도 목소리가 시큰둥하다. 새벽잠 설친 어느 날에는 벨소리만 듣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면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우아한 세계’ 중)라는 하소연이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다. 잘 살자고 죽도록 노력한 결과가 바로 이것인가. 짤막한 이혼통고. 한국영화가 그려내는 ‘기러기 아빠’의 공식이다.
친밀함과 그리움은 시간의 창조물이다. 하지만 관계를 잠식하고, 사랑을 부식시키는 것도 역시 시간의 장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관계의 가장 강력한 지원군도, 가장 강력한 적군도, 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 ‘에브리데이’는 매일 마주하는 ‘시간의 변덕’에 관한 이야기다. 5년간 감옥에 수감된 한 남자와 그의 가족들이 마주하는 일상과 관계의 변화를 담은 작품이다.
언뜻 이 설정만을 본다면, 대개 범죄 혹은 감옥과는 관계없을 당신, 우리 관객들에겐 아주 먼 이야기 같다. 과연 그럴까. 기러기 아빠 혹은 주말 부부라는 이름으로 ‘자발적 이산’을 선택해야 하는 우리 땅의 무수한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내는 ‘에브리데이’가 ‘남 일’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영국의 시골 마을, 한 가정의 부산한 하루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4남매가 있는 집안의 풍경, 하루의 시작이 정신 없다. 밥 챙겨 먹이랴, 옷 입히랴, 아래로는 한두 살배기부터 위로는 초등학생을 둔 30대쯤의 엄마가 힘겨워 보인다. 이렇게 간신히 외출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업고 끌고 간 곳은 어디일까. 런던의 교도소다. 이 집안의 가장이자 남편이며 아빠인 이안(존 심 분)은 5년형을 받아 수감 중이고, 아내인 카렌(셜리 핸더슨 분)은 4남매와 뒹굴며 매일 전투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카렌은 낮에는 마트에서 밤에는 동네 선술집에서 일하면서도, 주말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5시에 일어나 수백㎞ 떨어진 런던의 교도소를 꼬박꼬박 찾는다. 영화는 이들의 ‘5년간’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카렌과 아이들이 아빠와 만나는 장면을 중심으로 해서 시골 마을에서 가장 없이 보내는 아내와 자식들의 일상과 감옥에서 가족들을 생각하며 버티는 이안의 하루하루를 보여준다. 면회소 안. 아이들의 눈빛은 간절하고, 아내의 얼굴은 외로움과 고단함, 애틋함,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들을 맞는, 아빠의 의연함과 장난기는 오히려 안쓰럽다.
“학교 생활은 어떠니?” “말썽은 피우지 않았어?” “누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아이들에게 한 마디씩 묻는 것조차 짧디 짧은 면회 시간이다. 부부가 손 한번 맞잡고 애절한 키스 한번 하는 것도 서슬퍼런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
가끔은 어렵게 허락을 받아 아빠는 집에 전화를 한다. 처음엔 아이들이 서로 아빠의 전화를 받는다고 난리다. 하지만, 시간은 종종 악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열살 남짓 돼가는 둘째 아들은 주말에 교도소로 함께 가자는 엄마 말에 “아빠 안 보고 싶은데”라고 말한다. 성숙해가는 큰 딸의 얼굴도, 보기만 해도 눈물 그렁그렁하던 귀여운 셋째 아들도, 만날 투정부리던 응석받이 막내딸도 조금씩 아빠 보는 표정이 달라진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빠가 미처 읽어내기 어려운 표정들이 더 많아진다.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 관계란 그렇다. 변화는, 때로 도둑처럼 깃들고 때로 바람처럼 불어닥친다. 누구보다 아내가 서서히 지쳐간다. 아무도 같이할 수 없는 외로운 생활전선에서 어떤 남자가 보내는 따뜻한 미소. 마음이 흔들린다. 드디어 형기를 끝낸 이안이 집에 돌아온다. 그 집에는 여전히 아빠와 남편의 자리는 있을까?
극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질감이 느껴지는 섬세하고, 강렬하며 아름다운 이 작품은 보여준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사랑과 관계가 싸우는 유일한 대상은 시간이라는 것을. 특히 기러기 아빠의 경우에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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