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 노예제 폐지는 정치적 협상의 산물
흑인 주인공 내세운 서부극 ‘장고’ 노예제도의 폭력적 역사에 총질
미국 원죄에 대한 알리바이이자 여전히 인멸되지 못하는 증거로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흑인과 백인의 우정과 로맨스를 다룬 첫 미국 영화는 1936년작 ‘쇼보트’로 꼽힌다. 흑백 인종 간 결혼을 전면에 다룬 첫 영화는 1964년작인 ‘원 포테이토, 투 포테이토’다. 이 작품에선 흑인 남성과 백인 이혼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들이 결혼하려 하자 여성의 전 남편이 인종을 문제 삼아 아이의 양육권 소송을 건다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 밖에도 007 시리즈의 첫 흑인 ‘본드걸’은 8편째인 1973년 ‘죽느냐 사느냐’에서야 처음 등장했고, 메이저 영화사 첫 흑인 여성 감독은 1994년 ‘이대로가 좋아요’의 다넬 마틴이었다.
미국 아카데미상 연기 부문에서 첫 흑인 수상자는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대니얼이고, 남우조연상 수상자는 루이스 고셋 주니어(1982)였으며, 첫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시드니 포이티어(1963), 여우주연상 수상자는 핼리 베리(2001)였다.
미국사만큼이나 지난했던 할리우드에서의 ‘흑인 인권 신장의 약사(略史)’다. 서두를 길게 꺼낸 이유는 할리우드 영화의 두 거물 감독이 공교롭게 비슷한 시대 미국 인종 차별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과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장고)’다. 국내에선 ‘링컨’이 먼저 개봉하고, ‘장고’가 한 주 뒤인 21일 극장에 걸렸다. 물론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다. 흑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해 백악관의 주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마당에 나왔으니 말이다.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는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호쾌한 서부극을 통해 인종 차별이라는 미국의 ‘원죄’의 책임을 다시 묻는 작품이다. 서부극, 즉 웨스턴이라고 하면 원래는 ‘야만적인’ 인디언과 싸우는 ‘영웅적인’ 백인 총잡이를 통해 원주민에 대한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 개척사를 정당화시키고 지극히 미국적인 가치를 설파했던 액션영화 장르가 아닌가? 제국주의와 문명 차별, 인종 편견의 시각으로 점철된 장르에 흑인 주인공을 집어넣으니 100여년 역사를 가진 장르 자체에 뒤집혀 새로운 활기가 생겼다. 거슬러 올라가면 흑인이 주인공이 된 서부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작품으로는 1966년작인 랠프 넬슨의 ‘악마계곡의 혈투(Duel at Diablo)’가 꼽힌다. 백인과 흑인 총잡이가 힘을 합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들이 복수하고 무찌르는 대상이 ‘야만적인’ 인디언이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장르를 다시 꺼내든 타란티노는 ‘장고’를 통해 노예제도의 폭력적인 역사에 호쾌한 ‘총질’을 가한다. 때는 남북전쟁 직전인 1950년대 말. 아내를 백인 노리개로 빼앗기고 자신 역시 노예의 쇠사슬을 질질 끌며 살아가는 비참한 신세인 흑인 장고(제이미 폭스 분). 우연히 만난 바운티 헌터(현상금 사냥꾼)인 ‘닥터 킹’(크리스토퍼 왈츠 분)을 만나 자유의 몸이 되고, 둘은 ‘황금 콤비’가 돼 수배된 무법자들을 ‘사냥’하는 데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흑인과 백인, 두 남자는 장고의 아름다운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잔혹하기로 악명이 드높은 백인 대농장주 ‘캔디’(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와의 대결에 나선다.
이 영화에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연기하는 캔디는 흑인 노예들에게 가혹한 노동은 물론이고, 성적인 착취와 폭행, 살해를 일삼는 사악한 인물이다. 그를 돕는 흑인 집사(새뮤얼 잭슨 분) 또한 같은 인종, 같은 노예들을 학대하고 짓밟기는 마찬가지. 흑과 백이 한팀이 된 ‘좋은 편’과 ‘나쁜 편’이 말하자면, ‘흑백 혼합 복식 총격전’을 벌이는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 장고를 돕는 현상금 사냥꾼 닥터 킹의 존재인데, 그는 자유분방하며 유머러스한 노예해방론자이며 결정적으로는 ‘독일인’이다. 타란티노는 “미국인들의 원죄에 면죄부를 주지 않기 위해 흑인 조력자인 백인을 독일인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장르는 다르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흥미롭다. ‘링컨’은 인종 차별을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폐지에 이룬 ‘제도의 역사’이자 ‘정치적 협상의 산물’로 바라보는 반면, ‘장고’는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살육의 역사이자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가져온 결과물로 그려낸다. 결국 ‘링컨’은 노예제도로 상징되는 미국의 원죄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이지만, ‘장고’는 여전히 인멸되지 못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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