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모든 것이 그 링 위에 있었다.
먹여 살릴 처자식도, 자꾸 엇나가는 딸아이도, 생계와 뒤바꾼 상사의 모욕도, 잊어버린 청년의 꿈도 사각의 링 위에 있었다.
술집에서 말썽부린 자식의 미래를 돈과 권력으로 사는 재벌도, 아무 죄책감 없이 희생양을 만드는 괴물같은 아이들도, 청년의 꿈을 먹이사슬의 서열 속에 짓이겨넣어야만 유지되는 비정한 사회도, 가학과 피학의 관음증을 사고 파는 쇼도, 다 정글같은 링 위에 있었다. 자영업자도, 샐러리맨도 맨몸으로 나서 싸워야 하는, 그래야 다음 승부 때까지 생존이 연장되는 무대. 그렇게 펀치는 처절한 존재증명이었으며, 주먹 하나가 울음이었고 웃음이었다.
강우석 감독의 열 아홉번째 영화 ‘전설의 주먹’이 2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언론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153분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 액션과 유머, 드라마가 빈틈 없는 호흡으로 맞물려 전개됐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리얼리티와 ‘투캅스’의 유머, ‘공공의 적’의 통쾌함, ‘이끼’의 스릴감, 그리고 ‘실미도’의 처절함까지 아우르는 강우석 영화세계의 ‘종합판’이라고 할만했다. 임권택 감독을 제외하고는 현역 중 최다의 필모그래피를 가졌고, 19편의 영화로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보유한 강 감독의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선, 그리고 액션, 유머, 드라마를 다루는 영화적 감성이 응축됐다.
2013년 한국 사회의 풍경과 다양한 이슈를 사각의 링, 사각의 스크린 안에 응축시킨 ‘전설의 주먹’은 방대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꿰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웃음과 눈물이었다.
이 영화는 43살 동갑내기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케이블TV에서 지금은 중년이지만 고교 시절 전국 각 지역에서 내로라 하는 ‘주먹’으로 통했던 이들을 찾아내 다시 링 위에 세우는 ‘전설의 주먹’이라는 격투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고교시절 14대 1로 싸워 이겼다”는 배불뚝이의 사내도, “어린 학생의 몸으로 동네 건달들을 제압했다”는 중년의 남자도 도전장을 내미는 프로그램. 시청률을 올리려는 홍규민 PD(이요원 분)은 25~26년여전 사당, 동작 일대를 주름잡았던 ‘전설’, 임덕규(황정민 분)를 찾아내고, 그에게 출연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허름한 국수집을 운영하며 딸과 평범하게 살아가던 임덕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때려 사고를 친 여고생 딸로 인해 합의금 마련차 출전을 결심한다. 고교 시절 복싱 유망주로 88꿈나무로 불렸던 임덕규가 승승장구하며 전국적인 화제가 되는 사이, 그와 함께 학창시절 학교 일대를 벌벌 떨게 했던 또 다른 ‘주먹’ 신재석(윤제문 분)과 이상훈(유준상 분)이 가세한다. 신재석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말단 조폭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신세이며, 이상훈은 어엿한 대기업 홍보부장이지만 재벌총수의 뒷치닥거리나 해야 하는 처지다. 이상훈이 ‘모시는’ 회장은 덕규, 재석과 함께 어울려 다니던 재벌 3세 손진호(정웅인 분)였다.
40대 중년남자들의 비루한 현실과 패기만만했던 과거를 교차시키는 영화는 10대의 치기어린 쌈박질부터 프로격투기의 박진감, 40대 중년사내들의 처절한 생존투쟁까지 다양한 얼굴과 감정으로 액션을 그려냈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처절하며 때로 통쾌하다.
상금 몇 천만원 받자고 링 위에 오른 사내들은 “사는 게 빡빡하냐”, “살기가 만만치 않지?”라고 서로 묻는다. 누군가로부터는 “그렇게 산 게 자랑이냐”는 비수를 받고, “나 이렇게 살아왔다”고 쓸쓸하게 털어놓는다. 아이들에겐 “아빠가 제일 잘 하는게 뭐냐, 돈 버는 거 아니냐”며 호기롭게 얘기하고, 격투기 선수에게 흠씬 두드려 맞으며 “포기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링을 떠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인물들의 대사와 몸짓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들, 특히 30, 40대가 느끼는 피로감과 열패감, 좌절감, 위기감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된 셈인데, 그것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반칙과 편법, 서열, 폭력의 사회’다. 올림픽을 한다면서 엉뚱한 지역까지 마구 파헤쳤던 몰상식의 역사, 재벌총수가 야구방망이로 임원을 패고 룸살롱에서 접대부를 폭행해도 되는 무법의 사회, 언론과 재벌이 기사와 광고를 교환하는 비리의 커넥션 등 스크린에 그려진 한국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누구든 ‘계급장 떼고 맨몸으로 붙을 수 있는 링’은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건 무대였던 셈이다.
영화는 원작이 된 웹툰과 소재와 출발, 인물 구도는 같지만, 구체적인 설정과 극전개, 결말은 대폭 바꿨다. 내러티브는 좀 더 세밀해졌고, 액션은 더욱 긴박하게 연출됐다.
영화는 3명의 남자들이 맞붙는 최후의 대전에서 절정을 맞는다. 과거의 폭력이 일그러뜨린 그들의 삶, 링 위의 격투로서만 자신의 존재증명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재. 딜레마에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통쾌한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잊지 않으면서도 폭력 그 자체를 반성하며 모든 관객에게 위안을 선물하는 결말은 절묘하다. 한국 대중영화의 거장다운 강우석 감독의 ‘신의 한 수’라 할만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스스로가 링 위에 서서 사투를 벌였던 것처럼 욱신거릴 지도 모른다. ‘전설의 주먹’은 그런 당신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영화다. 극중 대사처럼 말이다.
“괜찮냐?”
“나 아직 안 넘어졌다. ”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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