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비주얼’에 신경쓰니까 촬영이나 조명 스탭들이 기겁을 하더군요. 영화 상영을 위한 마지막 디지털 작업을 하는 스탭들이 ‘강우석영화답지 않다’고 해요. 50대 감독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설의 주먹’은 강우석 영화가 정말 늙어가는가, 제가 영화 감독으로서 여전히 매력이 있는가, 제가 얼마나 젊은 감독인가를 가늠하고 시험하는 작품이 될 겁니다.”
‘승부사’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다. 강우석 감독은(53)은 자신이 내건 승부수의 목표와 의미를 명징하게 전했다. 오는 4월 개봉하는 ‘전설의 주먹’은 강우석 감독의 19번째 연출작일 뿐 아니라 여러모로 한국영화의 ‘도전’이다. 강 감독은 80년대 이후 데뷔한 감독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연출했고,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101편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을 제외하면 현역 감독 중에선 최초로 20번째의 고지 등정을 앞두고 있다. 젊은 감독들이 명멸하는 최근 격변기의 한국영화계에서 강 감독의 ‘전설의 주먹’은 80년대 이후 영화사의 ‘존재 증명’이자 50대 중견 감독의 ‘자존심’을 내건 승부구로 꼽힐만하다.
“‘도가니’나 ‘범죄와의 전쟁’같은 후배 들의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 전 세대 감독들이 밀려나는지 알겠더군요. 저는 5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지만, 강우석의 영화는 젊다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이것이 영화다’라는 평가가 나올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돌이켜보면 강 감독의 영화목록은 지난 25년여 한국 사회의 기록과 증언이었다. 대중의 웃음과 눈물, 분노와 환희로 시대에 대한 감각을 작품 속에 응집시켰다. 데뷔작인 ‘달콤한 신부들’(1988)과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1990)는 급속한 도시화 속 낙오된 청춘과 남성들의 페이소스를 담은 코미디였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지옥의 교실에 카메라를 갖다대면서 학원, 청춘물의 새로운 붐을 가져왔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투캅스’ ‘공공의 적’ 등 스릴러, 코미디, 액션을 변주하며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낙후된 정치, 사법 시스템의 균열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웃음과 분노를 잡아냈다. ‘마누라 죽이기’나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은 우리 사회 속 남성성의 위기를 과감한 코미디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실미도’와 ‘한반도’는 미결의 과거사를 현재로 끌어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물은 작품이었다면, ‘이끼’는 권력과 집단의 광기에 휩싸인 한 마을의 우화를 통해 체제 속 개인의 불안과 위기의 징후를 드러냈다.
‘전설의 주먹’은 어떨까? 이 작품은 ‘이끼’에 이어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동시대와 호흡하고자 하는 강 감독의 의지가 다시 한번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미디어와 조우했다. 학창시절 각 학교의 ‘전설’로 불린 싸움꾼이었지만, 지금은 비루하게 살아가는 중년남자들이 TV리얼리티쇼인 격투기 프로그램에 나가 과거에 못 가렸던 승부를 짓는다는 내용이다. 원작만화엔 질투와 복수, 죄책감으로 얼룩진 인생들의 고뇌와 한국 사회에서 중년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피로감, 리얼리티 쇼와 인터넷 등 집단의 광기 뒤로 숨은 익명의 비겁함 및 잔인함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다뤄졌다. 원작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돼 스크린에 옮겨졌을지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1차 티저 예고편 공개 후 수십만 클릭으로 나타났다. 강 감독은 “웹툰의 타이틀만 보고 ‘이거다’ 싶어 그 자리에서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2013년은 ‘전설의 주먹’이 개봉하고 차기작인 20번째 영화에 들어가는 해일 뿐 아니라 강우석 감독에겐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다. 영화사 ‘시네마서비스’의 창립 20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가 대성공을 거둔 지난 1993년 강우석프로덕션을 설립하며 연출 뿐 아니라 투자, 제작, 배급에 나섰으며 2년 후 시네마서비스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강 감독의 작품과 함께 임권택, 이창동, 이명세 등 한국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감독의 영화를 내놓았으며 류승완, 장진, 김대승 등 수많은 후배들을 데뷔시키거나 흥행감독으로 발돋움하게 한 한국영화의 산실이었다. 외화의 직배가 허용되고 삼성 대우 등이 진출했다 퇴각했으며, 다시 현재와 같은 대기업계열 영화사의 투자배급 지배구조가 형성됐던 지난 20년간 시네마서비스는 대기업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규모 자본의 힘으로 정립된 대기업 지배 구조로부터 시네마서비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충무로 외부의 자본과 긴장과 대결, 협력 관계를 거듭했던 시네마서비스는 한때 국내 1, 2위를 다투는 투자배급사였으나 현재는 제작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대기업계열 영화사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지금, 강우석 감독의 위기의식도 남다르다. 하긴 창립 이후 매순간이 위기였다.
“시네마서비스는 올해 라인업에 ‘올인’할 겁니다. 강해지든 해체되든 양단간의 결정이 나겠죠. 배급이 결정된 제 영화 말고 ‘더 파이브’ ‘깡철이’ 등 다른 제작 영화는 자체 투자를 할 겁니다. ”
영화계 입문 이후 30여년간 한국영화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강 감독. 후배들로 이어진 지금의 ‘르네상스’를 어떻게 볼까. ‘전설의 주먹’ 막바지 작업에 한창 중 최근 만난 강우석 감독의 말에는 긍지도 담겼고 쓴소리도 있었다.
“최근 흥행작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훌륭한 작품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한국영화가 얄팍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감독은 무엇보다 드라마를 쫓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되요. 외국에 진출해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이런 걸 찍으려고 왔나’는 질문을 던져야 할겁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영화는 절대 어느 언저리에 얹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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