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한지숙 기자]안방극장에 ‘건강한 놈’들이 몰려왔다. 그동안 주말, 일일드라마 속 주인공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거나 복수의 칼날을 가는 독한 여자들의 차지였다. 요즘엔 학력, 경력 내세울 것 없는 ‘백수 총각’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패기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이들은 적당주의와 편법, 부정과 부조리를 거부하며 자신 만의 삶을 꾿꾿이 개척하고 있다.
KBS1 일일드라마 ‘힘내요 미스터김’의 주인공 김태평(김동완 분)은 중졸 학력이 전부다. 직업은 가사도우미. 그것도 애 넷 딸린 노총각이다. 진짜 자신의 아이도 아니고, 죽은 형의 조카와 탈북 청소년 등 이래 저래 엮인 네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도저히 답 안나오는 인생이지만,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 않는다. 이름처럼 태평하고 낙천적이다. 그 점에 저절로 여자들이 달라 붙는다.
MBC 일일드라마 ‘오자룡이 간다’의 오자룡(이장우 분)도 앞치마를 둘렀다. 자룡은 어렵사리 들어간 감자탕 전문회사 인턴직에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뒤집어쓰고 짤린 뒤 “다른 사람에게 뽑히는 일이 아니라, 작지만 내 일을 하겠다”고 결심, 길거리에 포장마차를 차렸다. 다행히 엄마로부터 음식 솜씨는 물려받아 그가 고안한 ‘치킨 떡볶이’는 입소문을 타고 편의점에 납품 얘기까지 오가고 있다. 부모로부터 도움받을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부친은 직장에서 실직당한 뒤 택시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 사고합의금 5000만원을 물어줘야했고, 지금은 잘사는 아내 친구 도움으로 경비일을 하고 있다. 엄마는 동네 마트에서 일하다 역시 그 잘사는 친구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4일 첫 방송한 KBS2 월화드라마 ‘광고천재 이태백’에서 이태백은 금산애드 하청업체 간판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스펙(이력)은 ‘후지다.’ 지방대 시각디자인과를 나온 뒤 온갖 시간제, 임시직을 전전하다 겨우 간판회사에 들어갔다. 원청업체는 인턴사원 조차 ‘슈퍼갑(甲)’이란 냉혹한 현실이 뼈저리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바꾸는 전복적 발상을 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인이 되기 위한 꿈을 향해 한발짝씩 성장해나간다.
이들 드라마는 사회 루저(낙오자)의 성공기란 점에서 같다. 높은 청년 실업률, 신분상승이나 부의 축적이 어려운 사회구조 등 작금의 암울한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20~30대 청년들을 위로하고 일으케 세우고자 한 게 드라마제작사들이 밝힌 기획 의도다.
‘광고천재 이태백’ 연출자 박기호 감독은 “각자 처한 상황에서 마음 가짐을 바꾸면 그게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거를 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건강하고 착한 청년의 성공스토리는 허울 뿐인 포장이란 지적도 있다.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덮고두고, 개개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고 희망을 던지는 것 자체가 기만이란 얘기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20ㆍ30대가 가정의 품에서 떠나 사회적 자아를 찾아가는 기회가 막혀 있다. 현실에서 느끼는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드라마가 긍정적인 메시지만 전하면 박탈감은 더 커질 수 있다. 또 드라마가 사회 문제를 특정 개인의 문제로 희석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힘내요 미스터김’과 ‘오자룡이 간다’는 건강함이란 당의를 입었지만 그 속엔 뻔한 출생의 비밀과 재벌가 다툼이 주요하게 담겨있다. 김태평은 친모가 식품회사 대표이며, 다른 식품회사 오너 딸 우경(왕지혜 분)과 연인으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짙다. 오자룡은 재벌가 막내딸로부터 구애를 받아, 재벌가 사위자리를 예약해 놨다. ‘남자 신데렐라’ 스토리인 셈이다. MBC 관계자는 “드라마 시청률을 위해 이런 설정이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드라마를 막장으로 몰아간 게 방송사였는데 이제 다시 건강한 드라마를 내놓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드라마제작환경이)‘서울뚝배기’ 같은 서민드라마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풍토이고, 일상성은 거세되고 온통 판타지만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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