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는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 ‘사전’은 소통에 대한 소망의 결실
은밀한 욕망으로 뒤엉킨 ‘찌라시’는 음울한 이 시대의 또다른 초상
신약 성경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며 “만물이 그(말씀)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됐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말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요한복음은 이어진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며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됐다면, 사람이라는 존재와 그가 행하는 바도 말 그 자체와 등치될 수 있지 않을까.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결국 말은 곧 사람이며 삶 그 자체이고, 곧 행위로 맺어지는 관계라는 뜻으로도 받아들 수 있지 않을까.
20일 개봉한 많은 영화들 중 말에 관한 생각을 담은 두 편의 작품이 있다.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이시이 유야)와 한국영화 ‘찌라시:위험한 소문’(감독 김광식)이다. 사전 속의 말과 ‘찌라시’의 속의 말. 두 가지의 말은 어떻게 다르고, 무엇을 의미할까. 제목대로 보자면 하나는 행복하고, 하나는 위험하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과연 안녕한가?
‘행복한 사전’은 일본에서 국어(일본어) 사전을 편찬하는 한 출판사 직원들의 이야기다. ‘대도해’라는 표제로 ‘오늘의 말글살이’를 집대성하겠다는 사전의 편찬 작업은 극 중 1995년 시작돼 2010년에 끝난다. 무려 15년의 프로젝트다. 사전은 잊은 지 오래, 컴퓨터 버튼 하나, 스마트폰 터치 한 번이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단어풀이가 줄줄이 나오는 시대, 과연 사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의 한 출판사 ‘사전편집부’에 결원이 생기면서 새로운 팀이 구성되는데, 사교성이 좋고 매사 쾌활하며 자유분방한 직원 ‘마사시’(오다기리 죠 분)는 지루하고 재미 없는 일을 떠맡고 싶지 않아, 다른 부서에서 늘 외톨이로 지내는 ‘마지메’(마츠다 류헤이 분)를 자신의 팀으로 발탁해온다. 마지메는 동료들과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지극히 내성적이고 외골수이며 고지식한 사내다. 마지메는 얼떨결에 부서를 옮기게 됐지만, 사전 작업에 서서히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어간다. 그러던 중 10년 동안 묵고 있는 하숙집에 주인 할머니의 손녀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 분)가 함께 살게 되고,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운 마지메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도통 어찌할 바 모르는 감정이었다. 이에 마사시를 비롯한 출판팀 모두가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게 되고, 사랑에 한 걸음씩 다가가며 마지메는 자신만의 사전 목차에 ‘사랑’의 뜻풀이를 완성해간다. 그리고 10년, 15년이 흘러간다.
변화하는 시대에 사전 편찬업무는 무산될 뻔하기도 하고 부서가 해체될 위기도 맞으며 수천만의 단어 수집과 뜻풀이를 이뤄간다. 중년이 된 마지메와 결국 다른 부서로 옮긴 마사시는 드디어 15년 노력의 결실을 보게 된다.
영화 ‘찌라시’는 ‘행복한 사전’과는 전혀 다른 속도와 효율, 경쟁과 성공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찌라시’란 어지름, 흩뜨려 놓음, 광고로 뿌리는 전단이라는 뜻의 일본어 ‘ちらし’를 소리나는 대로 우리말로 표시한 단어로 흔히 증권가에서 비밀리에 유통되는 미확인 혹은 출처불명 정보들을 모은 비공식 간행물을 뜻한다. 정치, 기업, 연예 등 사회 각 분야의 소문과 동향, 스캔들 등 각종 정보가 수록돼 있다. 이 ‘찌라시’는 누가 왜 만들고 어떻게 유통되는가? ‘찌라시’는 찌라시의 실체를 소재로 한 첫 한국영화다.
이 영화는 찌라시에 실린, 국회의원과의 정체불명 섹스 스캔들로 여배우를 잃은 한 연예 매니저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이, 은밀하게 유통되는 찌라식 속 정보의 생산과 유통 현장으로 들어가 맞딱뜨린 것은 대기업과 청와대, 국회가 거대한 커넥션을 이루는 정보의 생산 및 유통, 조작 시스템이었다.
사전의 말과 찌라시의 말은 모두 수집되고 검토되며 사람들에게 유통된다는 점에서 한가지다. 하지만 사전의 말이 오랜 시간과 사유의 결실이라면, 찌라시의 ‘말’은 속도전과 경쟁의 결과다.
소통과 진실에 대한 소망이 사전의 말을 이루는 힘이라면 누구보다 빨리 알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며 성공의 무기가 된다는 믿음이 ‘찌라시’의 시장을 형성하는 조건이다. ‘공감’과 ‘공유’, 그래서 ‘치유’가 사전의 말의 바탕을 이룬다면, ‘공격’과 ‘폭력’ ‘지배’의 욕망은 찌라시의 토양이 된다.
‘행복한 사전’ 속의 사전 편집주간은 이렇게 말한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사전은 그 너른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입니다.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이지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음해하고 고발하고 폭로하는 찌라시가 어디선가 생산되고 소비된다. 인터넷에선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글들이 넘쳐난다. 사전을 잊은 지 오래인 우리 말은 과연 안녕한가. 터치 한 번에 쏟아지는 가시 돋히고 칼을 품은 말들의 홍수는 음울하고, 불행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초상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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