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배두헌ㆍ유오상 기자] #. 1994년 1월. 재벌2세들이 그랜저를 타고 새벽 도산대로를 달리던 도중 프라이드 승용차 한대가 차선에 끼어들었다. 기분이 나빠진 이들은 차를 세워 프라이드 운전자와 시비를 벌이다 급기야 집단으로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도로변에 있던 벽돌과 화분으로 프라이드 운전자는 물론 조수석에 앉은 동승자까지 두들겼 팼다. 피해자 중 한 명은 뇌출혈을 일으켰다.
무차별 폭행을 가한 재벌2세 중 한명은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동생 신준호(당시 롯데햄우유 부회장) 씨의 외아들 신동학 씨였다.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손자이자 제일화재해상보험 이동훈 회장의 아들 이석환 씨도 함께였다. 신씨는 사건 발생 이틀 후 영국으로 출국하려다 김포공항에서 붙잡히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 둘은 같은 해 4월 집행유예로 다 풀려났다. 당시 법원은 신씨에게 “전과가 없고 술을 마신 뒤 우발적인 폭행이었던 점을 참작한다”며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벌가 갑질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운전기사 폭행 갑질’로 몽고간장 김만식 전 회장과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 등의 논란이 채 수그러들기도 전인 3일, 이번에는 미스터피자로 유명한 외식업체 MPK그룹 정우현(68) 회장이 경비원을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내가 나오기 전에 문을 닫았다”는 게 폭행의 이유였다. 정 회장측은 “얼굴을 때리는 등 일방적인 폭행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건물 내 폐쇄회로(CC)TV에는 폭행 사실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재벌가의 갑질이 끊임없는 것을 두고 ‘사법부의 관대한 처벌’과 ‘들끓다가 금세 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크게 작용한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2014년 말 한국사회를 들썩였던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은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조 전 부사장은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났다.
영화 ‘베테랑’이 모티브로 삼은 이른바 2010년 ‘맷값폭행’사건의 가해자 SK그룹 2세 최철원 전 M&M 대표 역시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맷값폭행 사건은 최 전 대표가 50대 화물노동자에게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구타한 뒤 ‘맷값’이라며 2000만원을 준 사건이다.
전문가들은 재벌가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실재한다고 지적했다.
공정식 한국심리과학센터 교수(범죄심리학)는 “재벌의 갑질 범죄는 타인을 자신보다 아랫사람으로 보는 심리적 자만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죄질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며 “그런데도 형량은 더 낮고 오히려 약자에게는 엄격하다보니 시민들도 사법적 부정의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벌가 범죄의 경우는 보통 1심에서 끝나지 않고 오래 끄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민들이 분노하다가 시간이 흘러 관심에서 잊혀지면 슬그머니 낮은 형량을 부과하는 경우를 많이 봐 오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김도우 경남대 경찰학과 교수(범죄심리학)는 “재벌가의 경우 유명 로펌 등 최고의 변호인단을 꾸릴 수 있고 법 해석을 유리하게 이끌어서 결국 우리 상식에 비해 낮은 형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재판에 들어가기 전 아프다거나 사정이 있다며 재판을 최대한 미루는 것은 여론이 식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며 “여론이 잠잠해지면 판결을 하는 판사도 아무래도 부담이 줄기 때문에 형량을 낮게 받는 것이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갑질을 하다가 회사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한국 재벌들에게 없다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일본, 미국 등의 경우에는 갑질이 아니라 작은 부도덕한 행동 하나 때문에 기업이 송두리째 망하기도 한다”면서 “한국 재벌들의 경우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는 당장 큰 불이익이 올 것 같으니 고개를 숙이지만 진정성이 담겼는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badhone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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