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회> 죽음의 계곡 19
요즘은 어느 집엘 가보아도 너무 똑똑한 딸과 꺼벙한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학부형들이 많다고 한다. 어느 집 딸이건 똑소리 나도록 영리한 것이 오히려 지나쳐 걱정인 반면에 아들 녀석은 멍청하고 한심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중론이다.
대략 20년쯤 전이던가? 1993년 4월께 대중잡지를 통해 읽었던 기사 내용이 떠오른다. 아마도 어느 초등학교를 돌아본 기자의 소감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남녀의 성징이 바뀌어 드러나더라는 것. 남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에 미쳐 있고, 여자아이들은 손에 면도칼을 들고 뛰어다니며 남자아이들이 노는 고무줄을 끊고 냅다 도망치더라는 기사였다. 게다가 말싸움만 하는 남자아이, 주먹질하는 여자아이들의 사연을 읽는 도중에는 차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유리 양, 하늘이 두 쪽 나도 우리는 LPGA에 진출합니다. 아셨지요? 로레나 오초아, 소렌스탐, 신지애, 미셀 위… 뭐 이런 선수들 별거 아니에요. 메이저라는 존재 앞에서 긴장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무너질 이유도 없어요.”
신희영은 한 세대 앞서서 똑소리 나는 여걸이었다. 그녀는 남자에 순종해야만 대접받는 여자로서의 삶을 훌훌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모토는 확실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한 발 더 나아가서 되로 주면 확실하게 말로 받아야 직성이 풀리곤 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진출해야지요. 골퍼들에겐 꿈의 무대잖아요?”
“언젠가는 진출한다고요?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리야? 당장 진출해야지. 우리가 돈이 없어? 아니면 빽이 없어. 그러니 유리 양은 당장 훈련에 매진하세요. 다음 달부터 해외 실전감각을 기르기 위해서 유럽, 미국, 아프리카, 아시아… 닥치는 대로 명문 골프장을 순회하며 전지훈련에 돌입할 예정이에요.”
“올해 예산이 12억 원에 불과하다면서요? 해외 골프장을 순회하려면 저는 물론이고 팀장님, 매니저, 수행직원 2명… 적어도 다섯 명은 팀을 이루어야 하지요. 게다가 항공료, 호텔숙박비, 식비, 라운드 비용, 장비운반 등등…. 어이쿠 머리야. 그 많은 경비를 어떻게 조달하시려고요?”
드디어 때가 왔구나! 유리는 이 절호의 찬스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신희영의 성격을 너무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신희영이야말로 아픈 곳을 찔리면 찔릴수록 더욱 기가 승하는 철의 여인 아니던가? 지금 신희영의 아킬레스건은 유민 회장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패한 상처였다. 유민 회장이 레이싱 사업에 한 해 3000억 원을 쓰는 데 비하여 골프 예산이 고작 12억 원이란 사실이 너무 큰 상처였다는 말이다.
유리는 그 상처를 덧나도록 찌르는 중이었다. 차제에 스포츠팀장의 탈을 쓴 아버지 강준호와 매니저 백광돌을 해외 전지훈련팀에 합류시키려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을 발휘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까짓 돈이 얼마나 든다고? 그까짓 걸 왜 조달하지 못해?”
“무려 다섯 명이나 팀을 이뤄서 세계일주를 하는데 어째서 돈이 안 들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집을 팔아서라도 그까짓 경비쯤은 대고 말 테야. 그리고… 어째서 다섯 명이야? 일곱 명이지.”
“일곱 명이요? 더 따라갈 사람이 있나요?”
“나도 따라가야 하고, 전략기획실 한승우 실장도 따라가야지요.”
“한승우 실장님도요?”
“물론!”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승우 실장도 따라가야 한다는 말에 유리는 문득 먹구름을 떠올렸다. 그가 따라가면 아버지 강준호의 전략 수행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으리란 걱정이었다.
그러나 신희영은 생각이 달랐다. 스포츠마케팅팀장인 강준호야말로 어쩔 수 없이 달고 가야 하는 혹 덩어리지만, 싱싱한 청년 한승우는 꼭 데리고 가야 할 애완남이었다. 하물며 전지훈련을 빙자한 장기 외박여행에 어찌 사랑스러운 애완남을 빼놓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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