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회> 날개에 숨긴 칼 13
“혹시 말이야, 앞으로 현양 이름을 빌려서 약간의 돈을 옮겨놓으면 안 될까? 현양이 통장을 개설해주기만 하면 되는데.”
“방금 머리 검은 짐승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믿고 제 통장으로 돈을 옮겨놓을 생각이세요?”
“그 통장과 인감을 당분간 내가 보관하겠다는 말이지.”
좋다가 말았다고 해야 할까? 유민 회장은 이른바 차명계좌를 만들어 달라는 뜻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제련그룹을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까짓 돈 몇 푼을 파킹하기 위한 수단은 도처에 많고 많았다. 그런데 한낱 비서에 불과한 그녀에게 차명계좌를 요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주위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간파한 것일까?
“그야 어렵지 않아요. 회장님 말씀이라면 뭐든지 해드릴게요. 그런데 느닷없이 제 통장을 원하시는 까닭이 궁금해요.”
비밀주머니는 참기름병과 같아서 한 번 뚜껑이 열리면 졸졸졸 내용물이 흘러나오게 마련인 법, 일단 비밀주머니의 뚜껑이 열린 것을 확인한 현성애는 바짝 그의 곁으로 다가서서 유도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당신과 나는 일심동체라는 것, 이미 엎어주고 눌러준 사이였으니 더 이상 비밀로 숨길 필요가 있겠냐는 것…. 이걸 표현하기에 보디랭귀지보다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그녀는 유민 회장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작년에 어느 벤처기업을 인수하려고 했지. 그때 계열사를 통해서 이면으로 지급보증을 서준 것이 있는데….”
유민 회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때는 이때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다가가서 유민 회장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그런데요?”
“그 사이 주식이 반 토막 나버렸잖아. 은행 부채를 고스란히 계열사에서 떠맡게 되었단 말이지. 그런데 말이 계열사지. 내가 단독으로 투자한 내 회사나 마찬가지거든? 보증으로 줄줄이 물려서 결국 그 빚을 내가 갚아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처가식구 이름으로 파킹해두었던 워런티를 되찾아오려 했는데 그마저 물 건너갔으니….”
“처가식구에게 배신당하고, 돈은 돈대로 물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단 말씀이군요?”
“그래. 환장하겠어. 하필 랠리사업 때문에 돈이 제일 필요할 때 아닌가.”
역시 때는 이때! 현성애는 즉시 눈물연기로 돌입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엔 어느새 물기가 축축이 배어 있었다.
“처가식구도 남남이로군요. 이 어려운 때에….”
허벅지에도 감각이 있을까? 있겠지?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허벅지를 바짝 끌어안고 젖가슴을 밀착시켰다. 배신당한 늙은이에게 가장 위로가 될 만한 것은 배신 때리지 않을 만한 젊은 여자의 육탄공세 아니겠는가. 그녀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는 듯 어깨를 들먹였다. 물론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하지만 젖가슴의 보드라운 감촉을 그의 허벅지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회장님이 안타까워서 미치겠어요.”
“나도 속이 상해. 마음 같아서는 처가식구고 뭐고 모두 내쳐버리고 싶어. 이혼하고 싶다는 말이지.”
앗싸, 가오리! 현성애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혼하면 그나마 재산이 반 토막 나겠지? 돈 털리고 갈라서다보면 제련그룹과 함께 인생마저 부도나는 건 당연지사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더욱 서글프다는 듯 아예 그의 무릎에 안겨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 위를 쓰다듬던 유민 회장의 두툼한 손이 슬쩍 옆구리로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브래지어 속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유민 회장은 늘 그게 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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