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끝까지, 죽을 때까지 (24)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비록 눈밭에 통조림 깡통을 묻어놓고 벌이는 연습게임이었지만 강유리와 백광돌의 마음자세만큼은 진지했다. 언제던가…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 선상에서 옷 벗기 골프경기를 벌이던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는 말이다. 물론 복장도 예사롭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서건 복장부터 제대로 갖추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으므로.

“춥지 않아?”

“괜찮아요. 집중하다보면 추위도 못 느낀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녀는 두꺼운 모피코트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막상 깡통에 공을 넣기 위해 웨지를 잡는 순간만큼은 그 코트를 벗어야만 했다. 깡통으로부터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웨지로 스무 개의 공을 띄워 깡통에 넣을 때까지… 대략 7분 동안… 그녀는 코트를 벗어 백광돌에게 맡겨놓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말이다.

“집중! 집중하고 정확하게 띄워서 딸랑! 소리가 나도록 넣어 봐. 스무 개 중에 열다섯 개는 넣어야지”

“열여덟 개까지 넣을 수 있어요.”

그들은 연습에 전념하느라고 그 예사롭지 못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그들의 주위에는 열 댓 명이나 되는 구경꾼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냐고? 물론 그 시작은 예사롭지 않은 옷차림 때문이었다.

“소우, 쿨~ 판타스틱!”

은빛 콧수염을 기른 노신사가 나지막한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석양 무렵. 로코코 풍으로 설계된 호텔정원으로는 찬연한 금빛 햇살이 스며드는 중이었다. 공을 단번에 넣기 위해 웨지를 잡고 숨을 고르는 강유리의 자태는 황금 동상처럼 고요하게 머물러 있었다.

방금 전까지 따끈한 룸에서 쉬던 중에 갑자기 따라나섰으니 얇은 반팔 티셔츠 속엔 당연히 노브라! 베트남을 누비던 시절부터 버릇이 되어버린 짧은 스커트 아래로 늘씬하게 뻗어 내린 맨 종아리! 그 상황만으로도… 추위에 벌벌 떨며 미라처럼 옷가지로 잔뜩 동여맨 현지 사람들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하물며 운동으로 단련된 그녀의 곧은 자세… 간혹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당당히 내미는 자세라든지, 스무 걸음 밖에 있는 108mm의 구멍을 지그시 굽어보기 위해 허리를 곧추세운 모습은 환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오우, 굿! 굿!”

약간 몸을 숙인 자세였으니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밑으로까지 흘러내렸고, 언뜻 보이는 하얀 목덜미와 매끄러운 어깨가 석양빛에 어울려 연분홍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며 노신사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하나는 제대로 들어갔어. 그렇게 계속 하라고.”

리듬을 타듯 몇 차례 스윙을 하던 강유리가 경쾌하게 공을 띄우자 반짝 날아간 공은 거침없이 통조림 깡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백광돌은 재빠르게 깡통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공을 꺼내고, 그런 뒤에 다시 강유리는 공을 띄워 날리고… 이런 동작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주위에 둘러 서있는 노신사들은 숨을 죽인 상태 그대로였다. 마치 고압 전선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 선상에서와 흡사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유민 회장을 유혹하기 위해 철저히 연출한 상황이었던 점에 비해 오늘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상황이 재연된 것일 뿐.

“아! 그림이군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물론 영어 발음으로 들리는 말이었지만 저절로 뇌에서 번역되어 우리말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유리와 백광돌은 숱한 현지인, 혹은 관광객 무리의 한 중앙에 서있게 된 셈이었다. 복숭아 빛으로 익어가는 석양은 유리의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찬연하게 부각시키면서 신비롭게 되비치고 있었다.

꿈이로구나… 강유리와 함께 나서기만 하면 벌어지는 현상에 백광돌은 감탄하는 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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