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회> 바람 부는 길 20
순식간에 두 여자의 사적인 데몬스트레이션 장소로 변한 스키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산 정상에는 잠시 후면 최고 속력을 내서 산 아래로 곤두박질치려는 레이싱 선수들이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가 하면, 산 중턱에는 나팔 통이나 북을 하나씩 끌어안은 밴드부원들이 스키를 타고 질주하면서 음악을 연주하는 중이었다.
“너 이년! 이 망할 것아. 아무리 밉다고 만천하에 애비 망신을 시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브라스밴드 보다도 멀리 퍼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악에 받친 신희영의 목소리는 슬로프 건너편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까지 확실히 전해졌다. 물론 퍼포먼스를 벌이는 강유리와 유한솜도 그녀의 목소리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눈길을 달리던 신희영은 숨이 턱에 닿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할머니인데 100미터 달리기 주자처럼 껑충껑충 눈밭을 뛴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신희영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채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강유리가 플래카드를 휘날리며 내려온 뒤에 그녀가 점잖은 모습으로 기자들 앞에 등장하는 거였다. 물론 생방송 중이어야 했으며 비키니 차림의 강유리 주위에는 수많은 취재기자, 촬영기자들이 바글대야만 했다. 그때 신희영은 비장의 메시지를 펼쳐들기로 했던 것이다. 유호성을 겨냥한 호소의 글… 브래지어 속에 품고 있던 그 비장의 메시지를!
“에잇 나도 모르겠다. 호성아!”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지친 신희영은 눈밭에 퍼질러 앉은 채로 브래지어 속에 숨겨두었던 작은 천 쪼가리를 펼쳐들었다. 길이를 재면 1미터 남짓이나 될까? 강유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펼쳐들고 내려오던 플래카드에 비하면 새발의 피! 하지만 그 쪼가리에 적힌 사연은 뭉클했다.
‘내 아들 호성아! 너는 골프선수가 되어야만 해!’
만세 부르듯 메시지를 활짝 펼쳐든 신희영은 그 모습 그대로 눈밭에 드러눕고 말았다. 유관순 열사가 대수일까? 있는 힘껏 만세를 부르다 보니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줄줄 눈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엄마! 한솜아!”
이건 또 웬 난리? 신희영이 누워있는 쪽으로부터 대각선으로 3시 방향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질 않겠는가. 자세히 보니 건장한 남자 한 명이 허겁지겁 슬로프를 가로질러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냐고? 전진후에게 배신당하고 등록 마감일까지 코-드라이버를 구하지 못해 이번 게릴라 레이싱에 참가 신청도 하지 못한 유호성이었다. 그 역시 스키를 신지 않은 맨 구두 차림으로 슬로프를 가로질러 뛰는 중이었으므로 그가 내딛는 곳마다 토끼 굴처럼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오빠!”
“오메, 내 아들아!”
세상에… 신파극이 따로 있을까? 각자 별도의 요구사항이 적힌 플래카드, 혹은 천 쪼가리는 마침 골짜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바람이 좀 더 거세지자 플래카드는 광고 현수막이나 다름없이 펄럭이며 메시지를 강력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 명장면을 놓치면 어쩌나! 어느새 잔뜩 모여든 사진기자들이 어김없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VIP룸에서 이 신파극을 관람하던 재벌 2세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뿐인가?
“에잇! 카메라 뒤로 빼! 아웃, 아웃!”
열 받은 총감독이 촬영 중단을 선언했지만 다른 모든 촬영 감독들은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엔진 점화와 예열을 마친 머신들이 어느새 으르렁거리며 엔진음을 토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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