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의 모태, 수원 선경직물 터 가보니…
18세때 일본회사 선경직물 입사 2년만에 생산부장 승진 등 역량과시
전쟁에 폐허된 공장서 ‘주경야경’ 직기 직접 조립하며 공장인수 다짐
1953년 마침내 SK모태 선경직물 창립 ‘조선에서 크게 빛나’ 선경 이름 그대로
고향사람 만날 때마다 취직 권유 직원들 수원 제 1공장으로 보답
[수원=신상윤 기자] 사업가는 리더십이 강해야 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정의(正義)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업가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정의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 속에서 싹튼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려주는 것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리더십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SK그룹 창업자인 담연(湛然) 최종건 회장도 정의가 바탕이 된 리더십이 있는 사업가였다.
▶“조선(鮮)에서 크게(京) 빛난다”=경기 수원시 권선구 평동 1-1번지. SK의 모태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 수원공장이 있던 곳이다. 이 공장은 SK 창립 50년이었던 2003년 9월 가동이 중단됐다. 11만4700㎡(약 3만4000평)나 되는 넓은 부지에는 ‘공장’ 하면 떠오르는 톱니 모양의 지붕이 달린 공장들이 웅장하게 서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공장은 1990년대 중간에 도로가 나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공장 인수 후 각각 지어진 매점(건립 당시 수위실)과 본관(사무동) 등이 남아 나날이 발전하던 선경직물의 모습을 대신 전해준다.
담연은 18세 때인 1944년 수원 선경직물에 들어갔다. 선경직물은 1940년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교토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세운 일본 회사였다. 그는 입사 4개월 만에 여공 100명을 통솔하는 생산조장으로 발탁될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해방 후 1945년 생산부장까지 올랐으나 “평생 월급쟁이만 할 수는 없다”며 이듬해 사표를 냈다. 하지만 늘 ‘직물공장을 세우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1953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선경직물을 일반인에게 매각한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선경직물은 전쟁 여파로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최 회장은 걸어서 5분 거리밖에 안 되는 집을 오가는 시간도 아깝다며 공장 기숙사에 야전침대를 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쓸 만한 부품을 모아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이으면서 직기 4대를 조립해냈다.
선경직물을 인수하는 데는 걸림돌이 많았다. 당시 공장 부지는 3만9000㎡(약 1만2000평). 이 중 1만3000㎡(약 4000평)는 ‘다시 매입한다’는 조건으로 땅 주인이 갖고 있었다. 공장 매입 우선권도 땅 주인에게 있었다. 담연은 동생 종현의 양보로 부친 최학배 공(公)으로부터 동생의 미국 유학자금을 받아 공장 부지를 매입했고, 선경직물 50만주 중 49만9800주를 확보했다. 무조건 공장을 돌렸다. 추석 대목에 맞춰 인조견 400필을 내놓았다. 한 필에 900환을 받아, 36만환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약속한 빌린 돈을 갚고 동생 종현의 미국 유학을 성사시켰다.
1953년 10월 1일, 담연은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직기 20대, 종업원 60명이었다. 선경직물, 지금의 SK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56년 3월 법인등기 때 회사 이름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선경’이라는 상호가 일본 회사 선경직물에서 나와,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회사 간부들 사이에서 거론됐다. 하지만 담연은 “우리는 ‘조선(鮮)에서 크게(京) 빛난다’는 뜻의 ‘선경’이다. 그대로 등기하라”며 ‘선경’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고향 사람들 위해 선경직물 재건=담연이 선경직물 공장을 재건한 이유는 전후 사람들, 특히 고향인 평동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전쟁 전 선경직물 종업원의 80%가 평동 사람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직장이 없어 집에서 빈둥대기 일쑤였다. 담연은 평동 젊은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놀면 뭐해. 와서 일해”라며 취직을 권할 정도였다.
수원공장 제1공장은 담연의 의지와 직원들의 보은(報恩)이 이뤄낸 결실이다. 담연은 1953년 제1공장을 지을 때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공장 잿더미 속에서 낡은 벽돌을 찾아 재활용하기로 했다. 야근을 마치고 아침에 교대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벽돌 100장을 다듬어놓고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벽돌을 다시 쓰기 위해서는 헌 벽돌에 붙은 시멘트를 떼내야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아 다치는 직원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쟁 후 일거리가 없던 자신들에게 취직시켜 준 담연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담연은 그렇게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당시 직원들의 모임인 ‘유선회’는 아직도 담연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들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 때 담연의 개척정신과 ‘하면된다’는 불굴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그리운 시기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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