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권력이동’ 어떻게…
1세대-2세대의 이념대결 마오, 류샤오치와 20년 이념투쟁 덩샤오핑 부주석때 마오세력 제거
2세대-3세대의 정책대결 톈안먼사태후 鄧 심복들 잇단 실각 인적구성 변화시도로 유혈충돌 자제
3세대-4세대의 제도화 경제발전따라 국내정치 안정 최우선 依法執政 방침…집단지도체제 완성
“중국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인민은 일어섰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하 마오)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에 올라 선언한 건국일성이다. 그가 말했던 ‘중국의 새 역사’는 바로 유일 정당으로 군림한 중국 공산당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는 ‘이념 대결→정책 대결→제도화’의 길을 거쳐 ‘평화적 정권이양’에 근접한 공산당 권력교체의 과정이기도 했다.
중국의 권력승계 시스템은 세대별로 최고지도부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진화했다. <중국 지도부의 세대 구분 및 세대별 세부 사항은 본지 10월 9일자 31면 ‘中 금단의 땅’ 중난하이로 가는 길’ 참조>
▶1세대(마오쩌둥)~2세대(덩샤오핑), 이념 대결=퓰리처상을 받은 세계적인 중국 저술가 해리슨 E 솔즈베리는 마오를 ‘새로운 황제’라고 기록했다. 그의 권위는 신성불가침이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1958년 중난하이에 있는 자신의 거처 바로 옆에 온수 실내수영장을 짓기도 했다. 같은 해 시작된 ‘대약진운동’도 “15년 내 영국 경제를 따라잡겠다”는 마오의 말 한 마디로 전개됐다. 결국 지나치게 이상적인 계획과 목표로 이 운동은 실패했다. 대기근이 겹쳐 최소 3000만명 이상이 숨진 것도 그 시기였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은 20년 가까이 이념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 사상’, 즉 농촌혁명과 대중운동 중심의 공산주의 이념이 약점을 드러냈고, 마오도 잠시 당권을 내려놨다. 그 사이 마오쩌둥의 2인자로 지목됐던 류샤오치(劉少奇)가 주석직에 올라 마오를 강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1966년 홍위병(청년층이 중심이 된 마오쩌둥 추종 세력) 등 배후 조직을 통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일으키고 실권을 회복했다. 류샤오치는 자본주의를 신봉한다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실각한 뒤 고문 끝에 옥사했다. 마오쩌둥의 ‘4인자’이자 류샤오치 세력으로 분류됐던 덩샤오핑(이하 덩)도 이때 박해를 당했다.
이후 덩은 부주석으로 복권한 뒤 문혁 세력 척결에 나섰다.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의 조직은 문혁을 기획한 핵심 그룹으로 분류됐다. 결국 덩은 1976년 마오의 사망 직후 쿠데타를 일으켜 장칭을 숙청하고 이듬해 공산당 1인자에 올랐다.
▶2세대(덩샤오핑)~3세대(장쩌민), 정책 대결= 덩도 마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황제’로 불렸다. 집권 내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 만큼 당권을 둘러싼 마찰도 있었다. 이는 주로 혁명 원로들과 덩의 대결이었다. 이들은 한창 추진 중이던 개혁ㆍ개방의 속도 조절 등 정책 시행을 놓고 보수파와 개혁파로 갈라졌다. 1988년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이들은 정면충돌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87년 후야오방(胡耀邦)이, 1989년 톈안먼 사태 여파로 자오쯔양(趙紫陽)이 실각하는 등 덩의 정책 실무를 담당했던 심복들이 보수파에 의해 연이어 물러났다. 그러나 덩은 마오 시대의 교훈에 따라 유혈충돌을 자제했다. 대신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왔다. “개혁ㆍ개방이 속도를 내려면 젊고 전문지식을 갖춘 간부들이 필요하다”며 당 지도부의 인적 구성 변화를 시도했다. 이에 따라 당 지도부의 퇴임 연령이 비공식적으로 낮아졌다. 원로 등 보수파는 자동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동시에 덩은 1989년 이후 장쩌민(이하 장), 주룽지(朱鎔基) 등을 기용해 3세대로의 권력이양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3세대(장쩌민)~4세대(후진타오), 제도화=장은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내 정치의 안정을 우선시했다. 이는 ‘법제화’ 움직임으로 현실화됐다. 1997년 장은 ‘법에 의한 국가통치(依法執政)’ 방침을 확정했다. 이처럼 국가의 모든 분야가 법제화되면서 4세대로의 권력승계 작업도 이를 따랐다. 공산당ㆍ정부ㆍ의회 등 권력기관 간 역할이 분담됐다. 이에 따라 공산당 서열 1위인 국가주석도 후순위에 있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한국의 국회의장 격)이나 국무원 총리의 권리와 직능을 쉽게 침범할 수 없게 됐다.
그 결과, 장은 자신의 상하이방 세력을 4세대 지도부 출범 후에도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양성한 후진타오 세력과 협의와 타협을 통해 권력을 분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제도화 작업은 서열에 따른 명확한 직책 분담으로 집단 지도 체제가 형성되면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윤현종 기자> /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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