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0회> 사랑을 위한 의식 (38)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전 세계 여자 프로골프 2012 겨울대회에서 강유리는 벌써 사흘 째, 즉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중이었다. 대회 주최 측에서 촌스럽게 외국선수들 이름을 한글 자모순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강유리는 제1조에 편입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경기를 벌이는 1조 선수이기도 했지만 전광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질 않아서 함께 경기를 벌이는 캐리 웹이나 크리스티 커, 제니퍼 로자레스, 폴라 크리머 선수의 성적을 알 수 없다는 게 그녀의 큰 불만이었다.
경기가 시작되던 첫째 날… 의당히 곁을 따라다니며 응원해 주어야 할 유호성의 모습이 사라진 후로부터 그녀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다. 첫 경기부터 마지막 경기 중반에 이르도록 좋은 점수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이번 경기 내내 죽을 쑤었다는 뜻이다. 유호성의 이탈로 비롯된 마음의 혼란을 가다듬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ㅈ, ㅊ, ㅋ, ㅌ, ㅍ, ㅎ으로 이어지는 자모 순서에 따르다보니 공교롭게도 제니퍼 로자레스, 캐리 웹, 크리스티 커, 폴라 크리머 등의 네 선수는 마지막 조에서 함께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강유리가 궁금했던 것은 마지막 조의 성적이었던 것이다.
“지금 마지막 조 선수들 성적은 어때요?”
그녀는 뒤를 따르던 북한 캐디에게 이렇게 물었다. 캐디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북한식 카트인 밀차를 끌던 이른바 ‘여성 안내원 동무’였다. 형식을 갖추기 위한 배려일 뿐, 기능적인 캐디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시답잖은 것이나 물어볼 수밖에.
“모르갔습네다. 내레 꼴푸빽이나 메고 다니는 주제 아니갔습네까?”
강유리는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정보는 유호성이 물어다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작자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이번에도 빠를 하지 못하면 연속 세 번째 실패를 하는 겁네다. 마음과 자연,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게 한 후에… 공알을 천천히 카부에 넣으시기 바랍네다.”
캐디, 아니 밀차를 끌던 여성 동무는 수첩에 적어놓은 글귀를 앵무새처럼 읊어나갔다. 아마도 경기 주최 측에서 미리 작성해 준 노트를 읽는 모양이었다. 기막히도록 황당한 충고였지만 그녀가 결코 밉지 만은 않았다.
“퍼터 주세요.”
“네, 빠따 여기 있습네다.”
혹시 골프의 순 우리말이 뭔지 아시는지? 우스갯소리지만 골프의 순 우리말은 ‘왜 이러지’라고 한다. 샷을 할 때마다 빗나가기 일쑤인 아마추어 골퍼의 실력을 비꼰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퍼팅의 순 우리말은?
물론 퍼팅의 순 우리말은 ‘이상하네’이다. 역시 밀어 넣을 때마다 이상하게 빗나가는 골프의 특성을 드러낸 말일 것이다. 하지만 강유리는 실력이 쟁쟁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샷을 하거나 퍼팅을 할 때마다 ‘왜 이러지?’와 ‘이상하네’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또 빗나갔어.”
이번에도 역시 보기. 홀컵을 살짝 겉 돌아 나가는 미스 샷이 연출된 것이었다. 골프경기에 임했을 때에 자아를 버려야만 라운드 내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초보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샷을 할 때마다 분노가 폭발하고 결국엔 무리한 샷을 내지르게 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나를 안타깝게 만드십네까? 사소한 잡념 때문에 몰입이 되질 않습네까?”
캐디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강유리를 나무랐다. 그래도 강유리는 결코 그녀가 밉지 않았다. 흔들리는 샷을 연발할 때마다 웬일인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사소한 잡념에 흔들리는 선수를 보조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하지만 유호성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결코 사소하게 여겨지지 않더라는 게 문제였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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