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5회> 붉은 태양을 따라서 14
“치마 속에 뭐가 보이냐고 물었습니다.”
“…….”
권도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비굴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한심하게 여겨지기도 했으므로. 그러나 잠시 후 옆에 누워 있던 유호성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마치 훈련소의 군인들이 복창하는 것처럼 절도 있는 목소리였다.
“빨간 팬티가 보입니다.”
“또 뭐가 보입니까?”
“검은 망사스타킹이 보입니다.”
“또!”
“…에, 또… 하얀 속살이 보입니다.”
이런, 염병! 웃을 수도 없었고, 울 수도 없었다. 오로지 기가 막힐 뿐이라서 치마폭을 걷어차고 나가버리고만 싶을 따름이었는데… 또다시 재벌 2세의 독촉이 이어졌다.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 참으로 집요했다.
“권도일 전무는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입니까?”
“보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어째서 대답이 없습니까? 내가 장난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보이는지 대답해 보세요.”
“우리가… 오늘 밤, 점령해야 할 고지가 보입니다.”
얼떨결에 권도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순간을 모면하기엔 더없이 훌륭한 얼버무림이었다.
“우하하하! 그래요, 맞습니다. 우린 오늘… 함께 오입하기로 했지요. 그러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오늘 밤 점령해야 할 고지임에 분명합니다.”
순간 권도일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자칫하면 치마폭을 들추고 밖으로 뛰쳐나갈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참아야 한다. 대대로 이어져 온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수모라도 기필코 참아야만 할 것이다.
“역시… 권도일 전무의 재치엔 못 당하겠습니다. 자, 이제 대답을 들었으니 모두들 일어섭시다. 아가씨들은 다시 풍악을 울리도록 하세요.”
곧이어 “딩가당, 딩딩~” 풍악이 울려 나왔다. 그리고 눈치 빠른 마담의 지시에 따라 커다란 교자상이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위에는 말 그대로 산해진미! 신선로를 중심으로 음식이 차려진 걸 보니 대단한 주안상이었다.
“이제 술이나 마십시다. 아, 참! 그전에 할 일이 있지요. 마담, 아까 준비했던 것들을 가져오세요.”
“그럴 줄 알고 벌써 가져왔사옵니다. 대감!”
마담이 붉은 보따리를 풀자 웬걸, 조선시대 양반들이 머리 위에 썼을 갓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필시 말총으로 만들어졌을 그 갓은 그러나 모양이 서로 달랐다.
하나는 호박으로 된 갓끈을 달았고, 다른 하나는 호박 갓끈에 금패까지 달려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어이없게도 참대 끈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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