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에 자동차 사고의 현장 모습과 아찔했던 장면들을 전문 변호사와 패널들이 영상으로 보면서 교통안전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동차 블랙박스도 운행 정보를 디지털자료로 기록하는 형식과 영상정보를 카메라로 촬영하여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형식이 있다고 한다. 카메라 형식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블랙박스’, 미국에서는 ‘대시보드 카메라’, 일본에서는 ‘드라이브 레코더’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립항공박물관 전시실에는 항공기 ‘비행기록장치(Flight Recorder)’가 전시되어 있다. 항공기가 수명을 다해 폐기될 때 전시 및 교육용으로 수집된 것들이다. 블랙박스라는 용어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우리나라의 항공 관련 규정에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다만 ‘비행기록장치 콘테이너(Flight Recorder Containers)’라는 용례가 국제민간항공협약 부속서6(항공기 운항)에 보이기는 한다.
블랙박스라는 말과는 다르게 이 색상은 오렌지색과 황색이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돼있는 자료도 오렌지색이 대다수이고 황색도 한 종이 있다. 블랙박스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블랙이 아닌 오렌지색이었다고 한다. 위 국제민간항공협약 부속서(Annex)의 부록에는 ‘눈에 띄는 주황색(Distinctive Orange Colour)’으로 도색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고, 우리나라 국토교통부의 ‘고정익 항공기를 위한 운항기술기준’ 제7장에서도 ‘밝은 오렌지 또는 밝은 황색’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눈에 띄는 밝은 도색을 강조한 것은 유사시 비행기록장치를 쉽게 발견하기 위해서다.
항공기 블랙박스는 ‘데이비드 워렌(David Warren, 1925~2010)’이라는 호주의 과학자가 1950년대에 고안한 장치다. 그는 항공 사고 조사에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초기 블랙박스는 단순한 자료의 기록 장치였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비행자료기록장치(FDR;Flight Data Recorder)’와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Cockpit Voice Recorder)’로 나뉘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게 됐다. 1960년대 이후 항공기 제조사들은 국제 항공 법규에 따라 이 장치를 필수 장비로 장착했다.
비행자료기록장치(FDR)에는 항공기의 운항 자료들이 수집·저장된다. 항공기의 속도·고도·방위각·엔진상태·조종장치·기압·연료상태·착륙장치·비행경로·기상정보 등 많은 정보가 담기게 되는데 최신 모델에서는 1000개 이상의 변수를 단위별로 기록할 수 있다고 한다. 조종실 내에서 이루어진 음성 및 소리를 기록하는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는 조종사 간의 대화, 관제기관과의 교신, 경고음 및 알림음, 조종실의 주변 소음 등을 2시간 분량으로 순환 저장한다. 또한 고온과 고충격, 수중에서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된 이 장치들은 항공기의 후미에 장착된다.
항공기 비행기록장치는 사고나 이상 상황 발생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어쩌면 가장 유효한 기록이며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열쇠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열게 된 비행기록장치가 말해주는 중첩된 정보는 다음 단계의 안전을 위한 디딤돌이어야 한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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