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전남 장흥군 보림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고향 산천은 반기는 이 하나 없어도 언제나 정겹고 포근하다. 내 고향 전라남도 장흥군에 어릴 때 앞마당처럼 놀러 다녔던 조그만 사찰 보림사를 찾아간다.
장흥군으로 들어가는 초입 터널 입구에 ‘노벨 문학 도시 장흥’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본적지다.
‘아제아제바라아제’의 한승원, ‘당신들의 천국’으로 기억되는 이청준 등 두 명의 동갑내기 현대문학 거장을 배출한 곳이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승우, ‘녹두장군’의 송기숙 작가 등 걸출한 문학인들이 태어난 곳이다.
장흥의 남부지역은 바다에 면해 있고 북부지역은 수많은 산들로 연결돼 먹거리와 볼거리, 휴양지가 많아 한우와 키조개, 표고버섯을 함께 먹는 장흥 토요시장 삼합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내 고향 유치면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보니 거대한 탐진댐도 만들어졌고, 공기도 좋아 자연휴양림, 표고버섯 등이 유명해 웰빙 지역으로 인기가 있지만 예전에는 먹거리조차 부족한 깡촌이었다. 6·25 전란 와중에는 빨치산과 국군의 격전지가 돼 수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봐서 부모님께 수없이 들었던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작지만 의미 있는 사찰 보림사가 있고 그 인근에 ‘피재(피岾)’라는 고개언덕이 있다. 일부는 이를 전란과 연결 지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곳이라 해서 붙인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지만 ‘피재’는 이 지역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보림사 창건 설화와 연관돼 있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한반도(신라)로 돌아와 전국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아다녔다. 유치 보림사 터까지 도달해 보니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였으나 안타깝게도 연못이었다. 원표대덕이 이곳을 돌덩이와 숯덩이로 메우자 이 안에 살고 있던 뱀·이무기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유독 백룡(白龍)만이 끈질기게 버텨 지팡이로 쳐서 쫓아냈다. 못에서 쫓겨난 백룡은 피를 흘리며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용 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는 용소가 되는 등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졌다.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은 고개가 피재, 용소가 있는 마을 이름은 용문리라 하며 그 이웃에는 늑룡(勒龍)이라는 마을이 있고 피재 너머에는 청룡리가 있고 용두봉도 있다.
이렇듯 사찰 창건 시 용을 쫓아내는 설화들이 많은데 이는 초기 불교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 토속신앙을 용으로 대변해 표현했던 것 같다.

보림사(寶林寺)에 이따금 갈 때마다 조금씩 더 정돈되고 전각들도 하나씩 추가되고 있지만 여전히 은둔하고 있는 듯 조용하고 조그만 사찰이란 느낌이다. 우리나라에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온 중요한 사찰임에도 그러하다.
보림사를 싸고 있는 가지산(迦智山, 510m)도 산세가 인도와 중국에 있던 가지산 산세와 같다고 해 이름이 붙여졌고, 원표선사도 가지산사(迦智山寺)라고 했다. 그러나 원표선사가 울산에 석남사를 창건한 후 석남산(1240m)도 가지산으로 바꿔 부르게 됐는데, 울산 가지산이 장흥 가지산보다 높고, 영남알프스의 중심축으로 유명해 산 이름의 대표성마저 가져가 버렸다.
최초의 선종(조계종) 사찰 가지산문 보림사

선종(禪宗)은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대승불교의 한 조류로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했고,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추앙받는 ‘도의국사’는 달마대사의 선법(禪法)을 우리나라에 전해 선종은 조계종의 근원이 됐다.
장흥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원표대덕(元表大德)이 터를 잡고 거처했을 당시인 759년에는 초암(草庵)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에는 도의국사와 염거선사(?∼844년)의 법맥을 이어받은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804~880년)이 859년 사찰을 중건하고 가지산파를 열게 됐다.
통일신라 말기에 선종 관련 9개의 선문(九山禪門 )이 생겼는데 가지산문이 가장 먼저 문을 열어 조계종의 시원이 된 것이다. 체징 사후 헌강왕이 사찰 이름을 보림사(寶林寺)라고 지었는데 이는 선종의 발원지 중국의 보림사를 창건한 중국 불교 선종 제6조 혜능의 선맥을 잇는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전북 완주의 송광사도 보조선사 체징이 개창했다고 해 ‘조선 선종 수사찰’이라고 하는 현판을 붙이고 있다. 선종 가지산파 제3대조인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과 탑비는 유치 보림사에 있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도의국사가 전하고 구산(九山)에 선문(禪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에 이르기까지우리 민족의 정신문화 근간이 됐는데 그 출발선에 장흥 보림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흥 보림사는 인도의 보림사, 중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3대 보림사로써 하나가 돼 고려 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시대에도 국가 수호 사찰로서 건물이 암자를 포함해 105개소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보림사도 서서히 쇠락해 남아있던 20여 동의 건물조차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빼고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 빨치산이 보림사에서 한겨울을 났다고 해, 그 이듬해 봄 군경 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렀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해 1984년 대웅보전을 중건했고 대적광전은 1995년 복원했다.
동양 3대 보림사 중 하나

선종의 본찰로서 위상을 들어내는 다수의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장흥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순천 송광사의 말사이다. 보림사 주차장에서 처음 마주하는 ‘가지산 보림사’ 현판이 붙은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하다.

일주문 안쪽에 선종의 본찰을 표시하는 ‘선종대가람’과 ‘외호문(外護門)’ 현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나타난 사천문 내부에 있는 사천왕상은 1515년에 조성돼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고, 목조 사천왕상 가운데 높이 3.7m로 가장 커서 보물로 지정됐다. 사천왕은 보통 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지만 이곳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받들고 있다.

사천왕상의 몸 안에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희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됐고, 그 중 ‘월인석보’와 ‘금강경삼가해’ 등이 보물로 지정됐다.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나무로 된 사천왕상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었고 그 안에 보물급 문화재까지도 온전하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일주문과 사천문을 지나면 일직선상에 남북 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쌍탑과 석등, 대적광전 안에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이 모두 신라시대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가지산문의 개산 때 만들어진 듯해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다.

3m 높이의 석등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남·북 삼층석탑은 870년(경문왕 10년)에 건립됐다. 대적광전이 동향(東向)이라 두 탑을 남·북 삼층석탑이라 부르는데 남쪽 석탑은 높이 5.4m, 북쪽 석탑은 5.9m이다.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좌상은 광배(부처 머리 위에 있는 빛)와 대좌(받침대)는 없고 부처님의 몸(佛身)만 남아 있는데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손은 작지만 발은 지나치게 크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년)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 부관 김수종이 시주해 만들었다는 글이 적혀있어 제작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다.

대적광전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옛 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한 대웅전이 있는데 통층 구조의 2층 큰 건물이다.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은 대적광전을 원형 복원한 후에 대적광전으로 옮겼다.

대웅전 뒤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언덕에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보조선사 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와 부분 손상된 부도 ‘보조선사 창성탑’이 있는데 모두 보조선사 입적 직후인 88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거북 받침돌 위에 비(碑)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긴 창성탑비는 선(禪)의 경지와 보조국사의 행적, 창건 연기설화 등이 적혀있다.

보조선사의 사리를 안치한 ‘보조선사탑’은 전형적인 8각 탑신으로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그 밖에도 절 앞 주차장 끝자락에서 뒤편 잡목 숲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부도탑 군이 있는데, 가장 위쪽에 팔각 원당형 부도인 동승탑(東僧塔)이 있다.

절 밖으로 나와 서북쪽으로 200여m 떨어진 마을 안쪽에는 서승탑(西僧塔)이 홀로 자리하고 있다. 두 탑 모두 높이 3.6m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형식의 부도로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 ‘선종대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다.
보림사의 차 밭길(티 로드)을 바라보며 내게 묻는다

보림사 마당 한가운데에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 비자나무숲과 야생차밭 기운을 머금은 천연 약수로서 한국 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해 ‘보림약수’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약수터 자체도 정겨우니 물맛도 배가 된다.

150~300년생의 비자나무 600여 본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보림사 비자나무 숲’은 전국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천년을 이어온 장흥 전통 발효차 ‘청태전’은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청태전’의 원료인 녹차와 비자나무가 숲을 형성하고 있어 보림사를 둘러싸고 비자숲길과 ‘보림백모길(520m)’, ‘보림차약길(550m)’ 등 보림사 티 로드가 개설돼 있다.

숲길을 걸으며 심신의 피로를 풀고 활기를 되찾는 힐링의 공간이라는데, 걸어보진 못했다.
가지산에 진달래와 산벚꽃이 만발한 따스한 봄날, 산자락 깊숙이 자리 잡은 보림사에서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고향의 봄을 만끽해 본다. 참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의 종찰답게 침묵과 고요함이 감싼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움에도 아직 마당은 한적하다.
조용히 바람 소리에 의지하며 어디선가 보았던 글귀가 떠올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어디쯤에서 멈춰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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