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과천 관악산 연주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무척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봄기운이 넘어가는 5월 중순 화창한 날에 큰 행사를 치른 후 수고한 직원들과 좋은 공기 마시며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 했는데 졸지에 극기 훈련이 됐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악산이란다. 관악산은 서울특별시 관악구와 경기도 안양시, 과천시의 경계에 있지만 옛 과천군의 진산(鎭山)으로 해발 고도 632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관 모양으로 높이 솟은 산은 서울 관악구의 기원이 됐고 운악산(934m), 화악산(1468m), 감악산(675m), 그리고 개성의 진산 송악산(488m)과 함께 경기 5악으로도 유명하다. 북쪽 기슭에는 서울대학교가 자리하면서 새로운 명소로 변모했고, 동남쪽 기슭 과천에는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서 행정수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동쪽으로 경마장이 훤히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관악산은 서울대, 사당, 안양, 과천 등에서 오르는 등산코스가 많다.
좋은 산에는 어디를 가나 역사성을 간직한 사찰들이 몇 개는 있기 마련이다. 서쪽으로는 삼성산(481m)과 과거엔 동쪽으로 강남의 우면산까지도 포함하는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 하나로 한양의 방벽으로 이용된 관악산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원효·의상·윤필(尹弼)이 머무른 절 3곳이 일막·이막·삼막이었는데, 일막과 이막이 화재로 사라지고 삼막만이 남았다고 하는 안양 쪽의 삼막사,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裨補) 사찰이라고 하는 금천구의 호압사(虎壓寺), 오직 걸어서만 올라가야 하는 연주봉 아래 과천 연주암과, 국기봉(524m) 아래 안양 불성암 등이 유명 사찰들이다.

관악산은 경복궁에서 보면 불 화(火) 자와 비슷하게 생겨 불을 불러오는 산, 화산(火山)이라고 불렸기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를 끄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를 세웠다. 산 중턱에 물동이를 묻었으며 산정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영주대도 있다.
바위산이기에 모든 사면이 비교적 가파르지만 관악산 최고봉 연주봉을 가기 위한 가장 짧고 쉬운 코스라고 해 서울대 공대 쪽 버스 종점에서 출발하는 코스(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 코스)를 택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들어가는 길목에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라는 문장을 보고 일행 중 한명이 읊조린다.
세종대왕 탄신일인 스승의날(5월15일)을 앞두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떠난 두 형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설화가 얽혀있는 연주암과 연주대를 올라간다.
관악산 연주암 가는 길

연주대와 연주암을 가 볼 기회를 몇차례 놓쳤던 터라 서울대로 들어와 관악산 산길에 접어드는 순간 설렘을 결코 숨길 수 없었다. 서울대 캠퍼스 안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의 등산로를 준비된 생수 한 병씩에 의지해서 얼마간 올라가니 계곡 길을 만나게 되고 멀리 앞산 암릉의 경치도 끝내줬다.
청량감과 시원한 계곡 바람을 선사해 줬지만 등산 초보들이 오르기에 어려움이 있는 온갖 돌계단, 데크계단 길이다. 이미 봄꽃들은 모두 졌는지 찾아보기 쉅지 않지만 이름을 알수 없는 꽃이라도 우연히 마주치면 마냥 신기하고 반가움이 앞선다. 봄 초록의 싱그러움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5월의 봄이었다.

정상이 가까와질 무렵 연주대와 연주암, 안양 삼막사 등으로 나뉘는 갈림길이다. 연주암부터 가는 것이 이동경로상 편할 것 같아 내리막 데크길을 따라가니 먼저 맞이한 것은 효령각이다.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둘째 형으로 스님이 된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보존돼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있어 영정을 보지 못했다.
1411년(태종 11)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아버지(태종)의 뜻을 알고 유랑하다가 1396년(태조 4)에 이성계가 신축했다는 이곳 연주암에 머물게 됐다. 암자에서 내려다보니 왕궁이 바로 보여 옛 추억과 왕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한 나머지 왕궁이 안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고 한다. 연주암(戀主庵)이란 이름은 이들 왕자의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을 생각해서 세인들이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시화에 능했지만 방탕한 행동으로 눈밖에 났던 장남 양녕대군, 부처를 받드는 선비, 즉 속가제자라 일컫는 둘째 효령대군은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한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수많은 정적을 무참히 살해한 것을 지켜봤기에 혹시나 스스로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연주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 절벽에 연주대가 있고, 연주대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연주암은 본래 관악사로 신라 677년(문무왕 17) 의상대사가 현재의 절터 너머 골짜기에 창건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했는데 1868(고종 5)년엔 극락전과 용화전을 새로 신축했으며, 그 뒤에도 몇차례 중수 작업을 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당인 대웅전과 요사채, 종무소가 있고,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원 종각’이 있다.


오래되지 않은 ‘천수관음전’이 경사면을 이용해 2층 구조로 과천시를 바라다보고, 연주대 가는 길목엔 템플 스테이 장소로 사용하는 깔끔하게 신축된 ‘영산전’이 있다.

영산 쪽 뒤쪽 언덕엔 ‘12지탑’이라 부르는 탑을 세워 관악산 정상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고 정상 연주대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대웅전 앞뜰에는 효령대군이 세웠으며,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된 높이 3.6m의 3층 석탑이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당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 한분께 인사드렸더니 탄무 주지스님이시다. 차실에서 주지 스님이 주시는 뜨거운 차로 이열치열 몸을 식히고 염주 선물까지 받아 챙겼다. 물병에 물을 받기 위해 약수터를 찾다가 작은 간이매점을 발견했다. 생수, 아이스크림, 컵라면, 불교용품 등을 팔고 있고 음료수 자판기도 보이는데 생수 몇 병을 구입했다.
연주암에 있는 식당은 주말이면 비빔밥 같은 점심 식사를 저렴하게 제공해 점심 때쯤에는 등산객이 길게 줄을 선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공양간은 천수관음전 아래층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관악산 연주대와 응진전

연주암에서 연주대는 20여분 올라가면 되는데 오르는 길엔 과천 시가지와 경마장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인다.

길목에 연주대와 응진전을 올려다보는 포토존이 있는 전망대가 마련돼 있어 그곳에서 보니 연주암이 저 아래 내려다보이고 영산전 옆 봉우리 위에 석탑(12지탑)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관악산 정상 바로 옆 기암절벽의 형상이 10여개 크고 작은 돌기둥을 세워둔 것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운데 그곳이 바로 연주대요, 연주대 위에 올려진 듯한 전각이 연주암 응진전이다.

이곳이 연주대와 응진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인데 석축 위에 올려진 전각 ‘응진전’은 외부를 붉은 연등이 둘러싸고 있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연주대는 1973년 경기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왕조 개국 초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에 정할 즈음에 무악대사의 권유로 연주봉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석축을 쌓고 30㎡(9평) 정도 되는 대(臺)를 구축해 그 위에 암자를 지어 국운의 번창을 빌었다고 한다. 이를 연주대라 하며 거기에는 응진전(應眞殿)이라는 현판이 있는 불당이 꾸며져 있다.

연주대 바위 벼랑은 같은 간격을 두고 줄을 그어 내린 듯이 침식돼 있다. 뒤편에는 바위에 올라타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닌 우뚝 솟은 말바위(馬巖)가 있다는데 시간에 쫓겨서 찾지를 못했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정상부위에 기상청에서 운영하는 레이더가 있고 그 맞은편에 대형 지상파 송신탑이 있다. 둥그런 돔(또는 축구공) 같은 관악산 기상 레이더는 부산을 포함한 남한 본토, 북한의 평안북도 일부까지 커버할 수 있어 예전에는 우리나라 전체 기상을 관측했다고 한다. 지금은 백령도부터 제주도까지 남한 전역을 5개의 기상레이더로 정밀 관측한다.

송신탑 아래에 관악산 629m라 새겨진 바위가 있는 걸 보니 그 위의 큰 바위 끝이 632m 지점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표지석 옆으로 꾸불꾸불 깎아 만든 바위틈을 따라 막다른 곳에 도착하니 응진전이다. 불상을 중심으로 수많은 나한을 모시고 있는 조그만 전각이었다. 영험한 기도처라 알려져 많은 관악산 등산객이 찾는 곳이며 연주암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10세 때 왕세자에 책봉됐지만 25세에 폐세자가 돼 임금 자리를 아우인 세종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주유천하하며 많은 시서를 남겼다. 속가제자가 돼 수도에 전념하며 스님처럼 생활했던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함께 이곳 연주대에서 놀았다고 한다.
이때 양녕대군이 연주대에서 지었다는 시가 있다.
“산하조작반 라월야용등 독숙고암하 유존탑일층(山霞朝作飯 蘿月夜舂燈 獨宿孤巖下 惟存塔一層)”
“산 노을로 불을 때서 아침밥을 짓고, 담장이 넝쿨에 비친 달로 등불을 삼고, 홀로 외로이 바위 아래 누웠더니, 오로지 한층 석탑만 남아 있구나.”
이같은 한시가 명시로 전하고 있다. 효령대군은 여기에서 오랫동안 수도했기에 그의 초상화가 연주암에 보존돼 내려오고 있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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